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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2)   11-04-13
jcmm   4,227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2)
 - 율법과 죄 / 롬5:14 -

매주 하는 수요성경공부는 대게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합니다.
강의하다보면 시간이 모자라 중간에 끊어야 할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지금 강론하는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는 매번 한 시간씩 삼십회 이상을 해야 하는 강의입니다만 여덟 강좌로 요약해서 하기 때문에 핵심, 즉 액기스만 공급하는 것입니다.
액기스만 먹게 되면 자칫 설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물을 타서 마셔야 탈이 없습니다.
물을 타는 작업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주일 강론을 듣고 나서 한 주간 동안 물을 타는 작업을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단에 넘어 가고 비진리를 주는대로 받아 먹고 영적으로 체하고 병드는 것은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큽니다.
이제 주는 것만 받아 먹지 말고 영양가 있는 것과 허접한 것을 가려서 먹을 줄도 알고 영양가 있는 것을 가지고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들의 영적 건강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엑기스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지난 주 서론에서,

죄 문제는 신앙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죄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이 생길 때 신앙은 무럭 무럭 자라게 됩니다.
이번 강좌를 통해 율법에 죄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깨닫게 되면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율법 문제는 기독교인의 윤리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구원 받았으면 이제 기독교인의 생활윤리로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성경과 모순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새로운 윤리관은 ‘생명과 성령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심으로서 진리를 깨닫게 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삶이 기독교 윤리관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평안한 가운데 감사생활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감사생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율법과 죄’의 뿌리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I. 율법과 관계없는 죄

개신교 신학에서 ‘죄’에 대한 정의는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이라는 것은 기원 전 1,500년 전에 모세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정의대로라면 모세 이전에는 죄가 없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제까지 개신교 신학은 율법 이전의 죄 문제에 대해 기원이나 뿌리 연구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개신교 신학의 기반이 약합니다.
뿌리나 근원을 모르니까 결국 죄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도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개신교 신학의 현주소입니다.

암에 걸린 환자를 완전하게 치료하는 방법은 암의 뿌리를 캐내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종기를 도려낸들 환자에게 아픔만 줄뿐이지 치료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근원을 알아야 치료도 근원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죄란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는 취약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인본주의 신학에, 신비주의 신학에 밀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율법을 범한 것이 죄라고 가르치니 제대로 얼굴 들고 교회문을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난 주 말씀 드렸듯이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엿세 동안 율법을 밥 먹듯이 범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어긴 것이 죄’라고 가르치니 맨 정신으로 교회 나올 성도가 누가 있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죄 투성이고 사는 것이 죄 투성인 죄인들에게 ‘율법을 어긴 것이 죄다’고 가르치고 ‘죄 짓지 말고 하나님 잘 믿고 살아라’는 말처럼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근원부터 찾아가 보는 것입니다.

1. 타락 이전에 악이 있었다
이미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선과 악’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선악과 라는 나무가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창세기 2장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인간 존재와 무관하게 있었고,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금령과도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개념은 도덕적 최고 이상을 말합니다.
‘악’이라는 개념은 도덕적이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철학적,도덕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도덕종교, 규범 종교로 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법정 스님, 간디의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낍니다.
구구 절절이 다 공감이 가는 말씀들입니다.
공자의 교훈이 얼마나 도덕적 인간사회를 구성하는데 기준이 될 정도로 좋은 말씀입니까?
명신보감의 주옥같은 글들은 고상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약과 같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들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생각 없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불교나 유교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같은 맥락에서 보고 모든 종교에는 공통점이 있고 나름대로 구원의 길이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인천의 한 대형교회는 유교의 ‘효사상’을 교회에 도입하여 크게 성장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 ‘효도대학’을 만들어 주일학교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효를 가르칩니다.
노인분들에게는 좋지요.
자식 손자 그 교회 보내면 효를 배워서 용돈도 탈 수 있고, 효 관광여행도 다닐 수 있으니 이왕 교회 보낼 것 그 교회 보내지 않겠습니까?
교회인지 유교 학당인지 .......
기독교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이런 개념없는 가르침을 본인들은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교회만 부흥할 수 있으면 무슨 방법이든지 다 쓰려고 안달을 하는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입니다.

달라이 라마나 범정스님이니 간디나 공자의 가르침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현실세계가 이처럼 모순되고 불합리하고 타락해 있으니 도덕을 지켜서 이 땅에 이상세계, 도덕세계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이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류 역사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도덕을 지키면서 살 만큼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합니다.
공산주의 이론만큼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는 완벽한 이론이 어디 있습니까?
이론대로 되면 벌써 이 땅에 유토피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 되잖아요.
실패했잖아요.
그들의 아름다운 이상들은 다만 이상일 뿐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도 모른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러시아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할 때 실무를 담당했었습니다.
직접 러시아 전역을 돌면서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조직해 놓고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처음 사할린에 갔을 때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들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 그리고 흰 피부....
식당에 갔습니다.
카운터에 금발의 미녀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앞에 다라에 음식을 가득 담겨져 있었고 그람수를 재서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 내용물이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파리가 뒤 덮고 있었습니다.
그 미녀들은 파리를 쫒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잡담만 하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유리잔이 깨져 있었습니다.
식당문을 나설 때까지 아무도 치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시간만 때우면 되기 때문에 나 몰라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산주의로 인해 망했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것입니다.
이상은 좋지만 인간 본성이 타락했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실패한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나 법정이나 간디나 공자조차도 자기들이 말한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혹 모든 인류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그들과 같은 수준이 된다면 혹 그런 이상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인간은 본질이 죄인일 뿐입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실패하라고 절망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기독교를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도덕종교, 규범종교로 만드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성경의 선과 악의 개념이 인간의 철학적 도덕적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타종교의 가르침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선과악’은 하나님이 절대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좋아 하시는 것을 ‘선’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싫어 하시는 것을 ‘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 이성과 절대 감정과 절대 의지로 좋은 것이 바로 ‘선’이고 ‘싫은 것이 바로 ’악‘입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사기꾼입니다.
이사야 41장 14절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선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5절에,“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말씀에 주의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일이나 경건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준은 뭔가 엄청난 일을 했거나 경건할 때 의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의지가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죄인인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성경은 악과 죄와 범죄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죄의 기원과 뿌리에 근접하지 못한 오늘의 신학은 혼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죄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처방마저도 혼돈스러워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주지 못하니까 불 받고 방언하는 신비체험을 통해 확실성을 가져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 거짓된 확실성에 메달린 수 많은 신자들의 삶의 변하지 않는 이유가 바른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죄의 뿌리입니다.
죄가 있기도 전에 악이 먼저 존재합니다.
악이 있기 때문에 죄가 형성이 됩니다.
악은 존재하지만 때로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악이 인간 내면 속에 구체화되게 되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미움은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을 향해 미움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내 속에 마치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를 열 받게 만들면 순간적으로 미움이 내 속에서 구체화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 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면의 죄가 밖으로 폭발하여 그 사람을 죽이게 되면 그것을 ‘범죄’라고 부릅니다.
즉 악이라는 것은 뿌리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죄라는 것은 줄기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범죄라는 것은 열매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악이 아담과 하와의 내면 속에 선악과를 보면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구체화되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은 완벽하게 창조되었지만 죄의 유혹을 물리칠만한 능력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내면에 구체화된 죄가 표출이 되어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구분을 알게 되면 죄의 해결 방법 역시 구체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율법 이전에 죄가 있었습니다.
개신교 신학에서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연히 율법이 생기기 전에 죄는 존재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살인 사건은 죄였었습니다.
창세기 4장 8절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13절에,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죄악으로 충만해 홍수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6장 5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죄악으로 충만하여 불과 유황불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8장 20절에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율법 이전에도 죄가 있었는데 개신교 신학에서는 ‘율법을 어긴 것이 죄다’는 규정이 얼마나 미숙하고 문제 투성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이나 노아시대나 소돔과 고모라시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죄입니다.
뿌리입니다.
도적질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도적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뿌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주셨나?
죄악을 죄악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시골에 사는 한 어머니가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아들을 위해 맛있는 간장을 담가 왔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아들이 아침을 거르지 말라고 간장과 참기름을 가져 온 것입니다.
아들은 새벽에 일어나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밥을 해서 대강 간장에 참기름을 비벼서 먹고 출근을 했습니다.
겨우 쉬는 일요일 날 창문을 열어 놓고 환기를 시키고 대 청소를 합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모든 창문을 열어 놓고 대청소를 하다가 부엌을 청소하는데 간장독에 빠져 죽은 쥐를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매일 아침 그 간장을 먹은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밝히 비추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본성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십자가로 가는 것입니다.

II. 율법과 관계 있는 죄

1.금과법 아래서의 죄이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나?
그리고 왜 따먹도록 내 버려 두셨나?
이제껏 신학계의 결론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신학자에게 어떤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그 교수님의 대답이 “학생 나도 하나님 앞에 가면 제일 먼저 그 질문을 하고 싶네”
혹 여러분들 가운데 주일학교 때 교사 선생님한테 이런 질문을 한 일이 있습니까?
어떤 대답을 들었습니까?
“나도 잘 모르니 목사님한테 가서 물어 봐”
목사님한테 물으면 어떤 대답이 옵니까?
“몰라도 되 그냥 믿어”
“우리는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너무 많이 알면 다쳐”
죄의 근원을 모르니까 근본적인 해결책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선악과 문제는 단순히 이 문제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인,
(1) 인간의 자유의지
(2)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
(3) 타락전 선택이냐 타락 후 선택이냐
(4) 율법이 지금도 필요하느냐 필요하지 않느냐
(5) 성화에 있어서 신인협력설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의 해답만이 있음을 알고 선택해야 합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안에서 섭리되는 것을 허용하신 것인지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작정 밖에서 인간의 순간적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신것인지?
원래는 그런 계획이 없었는데 아담이 갑자기 사고를 쳐서 당황하여 구원계획을 세우셔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한 것인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만일 작정대로 허용하셨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만일 후자일 경우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떠나 독자적 의지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하나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독립적 존재라는 의미는 인간 스스로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별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국적도 결정할 수 있고, 외모도 스스로 결정하고 삶과 죽음의 시점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궤변에 불과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는 지는 너무도 분명하게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고 한 것입니다.
‘표상’이란 무엇입니까?
‘모형’ ‘그림자’란 말입니다.
오리지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만드셨다는 것은 둘째 아담을 보내시겠다는 말입니다.
왜 보내시려고 하셨는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기로 작정해 놓으시고 그 표상으로 첫째 아담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가 죄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타락하지 않았는데 예수께서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대속제물로 오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사건만 예정이 되었고 첫째 아담의 사건이 예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둘째 아담 그리스도 예수가 오시려면 반드시 첫째 아담이 타락해야만 합니다.
선악과를 먹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나게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못 따먹게 하려면 아예 만들지 않으셨던가 아니면 만들었다하더라고 에덴 동산 골짜기 절벽에 만들어 따 먹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가장 자주 왔다 갔다하는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을게 무엇입니까?
그리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만드셨습니다.
만일 못 따먹게 만드시려면 선악과 모양을 가장 흉측하게 만들어 보기도 싫게 만들고 만지기 조차도 역겹게 만들고 그것 먹으며 바보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오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만들었겠습니까?
분명하지 않습니까?
따 먹으라고요.

왜 따먹으라고 했을까요?
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셨다가 의인으로 만드시는 것일까요?
왜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성전을 이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무너뜨리게 하셨다가 다시 세우게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에 패해 포로되게 하셨다가 기적의 방법으로 해방을 시키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을 때리셨다가 다시 싸메시는 것일까요?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들어 이 진리를 더욱 확고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느날 탕자가 집을 나가도록 허용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어떤 인물인지를 너무도 잘 압니다.
아버지니까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무슨 짓을 할 것인지 환히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죄 짓도록 허용하십니다.
완전실패할 것을 아시고 내 보내십니다.
거지가 되고 돼지우리 속에서 쫄쫄 굶으면서 비참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계시면서 왜 아들이 그토록 비참하게 되도록 허용하셨겠습니까?
아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의도대로 돼지우리 속에서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오게 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와 용서와 사랑을 깨닫는,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깨닫는, 아들의 지위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는 진정한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통해 인류를 죄악 가운데 가두신 이유입니다.
로마서 11장 32-33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키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은 죄 짓도록 허용했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지나 온 우리 삶의 흔적 가운데 지우고 싶은 죄악이나 상처나 실패가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와 구원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악이나 실패 때문에 좌절하거나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무지한 행동입니다.
자신의 죄악이나 실패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구원과 축복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내 죄악의 중함을 몰랐다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또한 모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으로 접근하는 길입니다.
 
2. 율법 아래서의 죄
율법이 없으면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가 죄 인줄 모릅니다.
인도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쓰레기를 버립니다.
어느 때는 뭉텅이로 버리기도 합니다.

톨게이트 지날 때마다 스트레스입니다.
테그를 단 차들이 가는 라인에 일반 차가 끼어듭니다.
그리고 부츠에 돈을 냅니다.
빠르고 편하게 가기 위해 산 테그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테그 라인에 일반차가 끼어들어 돈을 내는 놈이나 그것을 또 받는 놈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모르니까요.
그런 사람들에게 벌금 천 루피씩만 메기면 다시는 안하게 된다
율법이라는 것은 깨닫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통해 인간의 죄악성과 부패성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의 용서와 은혜와 구원하심만을 의지하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다음주에는 ‘율법과 죄의 관계’에 대해 살피겠습니다.

<금주 구역공과 나눔>

1. 지난 주 핵심 설교에 물을 타는 작업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지난 주 설교가 맞는지 성경을 찾아보고 연구를 하고 있습니까?)

2. 현대 신학에서는 ‘죄’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왜 틀린 정의 입니까?

3. ‘악’과 ‘죄’와 ‘범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4. 선악과는 왜 따 먹게 하셨는지 추리해 봅시다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3) 율법과 죄와의 관계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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