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LOGIN

MEMBER LOGIN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3) 율법과 죄와의 관계   11-04-13
jcmm   5,644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3)
율법과 죄와의 관계/롬7:15-25

오래 전 한국의 모 국립대 법대 교수 한 분이 델리대 교환 교수차 일 년 정도 델리에 오게 되어 우리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분은 주일 예배도 빠짐없이 출석했고, 십일조를 낼 정도로 신앙도 좋았고, 특히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색을 하고 담임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항의를 했습니다.
“왜 담임목사님은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과 주재원들을 위해 기도해 줍니까?
그들은 총칼만 안 들었지 인도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러 온 경제 점령군들입니다“
결국 그 교수 부부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교수 부부는 북한의 정책과 김정일을 동경하는 좌파였습니다.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정치범들이 요덕 형무소 같은 곳에서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죽어 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얼마 전 이북에 가서 남한 정부를 비판하고 북한을 찬양하고 온 한 상률 목사 같은 인물이 전형적인 좌파입니다.
지금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데 본인은 순교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십 여명 되는 그의 교인들 역시 담임목사님이 감옥에서 정의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다고들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아니잖아요.
사상적 불균형으로 인해 본인과 가족은 물론 사회에까지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한번 좌파 사상에 물들면 평생 그 사상에게 벗어나기란 극히 드뭅니다.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어떤 신앙심이란 한번 물들면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한번 이단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어떤 교회에서 시작을 했는가?
어느 목사님 밑에서 배웠는가?
초기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의 신앙의 칼라가 결정되기가 쉽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이미 알고 있는 기본적인 신앙과 교리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새로운 진리를 수용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천주교의 주요 교리들은 성경과는 전혀 다르지만 천주교인들은 성경을 배우기 전에 먼저 교리부터 배우기 때문에 후에 성경에 대해 듣더라도 이미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교리에 의해 성경을 판단해 버리기 때문에 그 오류에서 평생 벗어 날 수 없게 됩니다.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들을 때 가능한 내 머리 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교리나 왜곡된 개념을 뒤로 하고 순수하게 성경적인 관점만을 가지고 설교를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설교 내용이 맞는지에 대해서 부지런히 성경을 찾아 가면서 확인하기를 바랍니다.
금번 시리즈 설교가 한 시간씩 삼십 회 이상의 분량인데 여덟 번으로 요약한 엑기스이기 때문에 물을 타야 하는데 그 작업은 여러분들의 몫이라는 것이 이런 의미로 한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물타는 작업을 돕기 위해 제가 평소 보다 약간 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여러분들 스스로가 성경을 통해 진리를 확증 해야만 합니다.
아니면 평생 혼란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머리가 정리되어야 삶이 정리되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율법과 죄와의 관계,

I.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19-23절에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용도는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입니다.
이런 분명한 성경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일단 ‘율법과 죄’라는 말만 나와도 거의 반사적으로
공자를 비롯해서 타 종교가 “도덕을 잘 지켜 도덕적 인간이 되고 정의가 흐르는 이상세계, 유토피아를 이루라”고 가르치듯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도 틀림없이 착하게 살라고, 죄 짓지 말라고 주신 것이라는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이런 단편적인 생각들은 핵심에 접근하는데 큰 방해물이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선언을 통해 율법을 잘 지켜 사람이 의롭게 되거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율법을 잘 지켜 사람이 의롭게 되거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어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죄를 짓고 사는 인간들에게 그 행위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은 너무도 자연적이고 필연적입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심정에 사악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죄를 필연적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인생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1:15)고 고백하면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악을 행함이라 이제 악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5-17)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되도록 하셨나?
이 의문은 강의를 듣는 중에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를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거울은 보여 줄 뿐이지 닦아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 우리의 죄를 보여 주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 죄를 경감시키거나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율법을 가장 건전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나는 죄인이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그리스도께로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율법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율법대로 살아야지”고 생각하고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지킬수록 더 실패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자포자기 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자유와 평안이 사라지게 되고 감사와 감격이 전혀 없는 메마른 종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마틴 루터의 고민이었고 마침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에 붙잡혀 중세 천년의 어두움을 깨는 종교개혁을 이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을 주셔서 죄를 죄 되게 하시는가?
인간을 죄인 만드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왜 선악과를 따 먹게 해서 죄인 되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인가?
이런 질문을 당연한 것이며 설교를 듣는 중에 저절로 해결이 될 것입니다.

II. 율법은 죄인 되게 하여 죽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9-13절에도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선악과나 율법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주신 것일까 죽이기 위해 주신 것일까?
답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조금도 주저함이나 의심의 여지없이 선악과나 율법을 인간을 죽이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라고 했습니다.
창조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연적으로 혹은 독자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시며 통치자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03편 19절에,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고 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아버지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마10:29)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도록 허용하신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을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절대자시며 창조자이심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의지의 소유자이십니다.
선악과를 안 따먹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인데 인간이 따 먹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의지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의지대로 되지 않고 인간의 의지대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느냐 죽느냐는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수동자가 되고 인간이 결정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보좌에서 끌어 내리고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학의 기본 틀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게 허용하시고, 인간이 죄 짓는 것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주의,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앙이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여기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고 인간 개인의 사색과 사상과 철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알려하는 일반종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고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여기 ‘말씀’이란 ‘로고스’를 말합니다.
로고스란 ‘하나님 뜻,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작정’같을 말입니다.
세상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작정 같은 것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일어난 사건인 것입니다.
이 사실만 깨달아도 기독교 세계관이 확 열리게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사건은 돌발적인 사건이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 몰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사단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기 때문에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타락하게 만들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욥기를 보세요.
사단은 능력이 많지만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욥의 머리카락 하나 다치게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면,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며  그 앞에 떨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고 했습니다.
저도 인도에서 귀신을 여러 번 추방시켰습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단이 방해해서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사단이 하나님보다 더 힘 있는 존재라는 말이 됩니다.
성경의 세계관은 일원론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세상을 하나님과 사단과의 대립구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초기 시대에 정죄를 받았던 이단 사상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난 돌발 사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담을 죄인 되게 하시고 영적으로 죽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작정 섭리 안에서 일어나게 하신 계획된 섭리이다.
즉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한 금과법은 아담을 살리기 위한 법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생령인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실상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반대되는 일, 하나님 몰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살리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까? 아니면 죽이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까?
당연히 죽이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범하므로 그 죄로 인하여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젊은 세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들 역시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주변 국가들의 침입을 받아 망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회복이 되었지만 또 다시 율법을 범하므로 망하여 죽게 되고, 은혜로 회복이 되고 또 율법을 범함으로 망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갈라디아 3장 13절에 율법 아래 나게 하셨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어 율법의 저주를 받은바 되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즉 율법은 예수님을 살리신 것이 아니라 죽이신 것입니다.

성도들과 전 인류 역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어 인간의 죄로 죄게 되게 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9-13절에도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하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고 했습니다.
종합해보면 금과법이나 율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하시는 자시냐?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해서 죽게 만드시는 분이냐?
우리가 지은 죄도 그럼 하나님께서 짓게 하신 것이냐?
여기부터 지금까지 알고 있는 교리나 왜곡된 개념을 뒤로 하고 성경의 증언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하신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타락과 죄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증거하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죄를 짓게도 하시는 분입니다.
실패를 허용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의 지워지지 않는 상처도 주시는 분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동생 요셉을 노예로 이집트에 팔아먹은 사건은 공자가 보면 천하에 죽일 놈을 이라고 노할 일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범죄와 상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조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 아버지 야곱에게 하신 약속 “자손이 하늘이 별과 같이 땅에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며 네 보이는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며, 너의 자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삼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범죄와 상처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참으로 이런 사실을 보면서 경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야곱은 속아서 결혼하여 두 명의 부인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 부인 라헬이 아이를 못 낳자 라헬의 요구대로 라헬의 몸종을 첩으로 들여 아이들을 낳습니다.
첫 부인 레아가 질투심으로 자기 몸종을 또 첩으로 줍니다.
그 첩으로부터 또 아이들을 낳습니다.
부인 둘에 첩 둘에 나중에 장자가 아버지의 첩을 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부도덕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도덕한 집안에서 나온 열 두 아들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들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야곱의 열 두 아들들 가운데 유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양털 깎으러 타 지방에 갔다가 그곳에서 창녀와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창녀는 다름 아닌 자기 며느리였습니다.
거기에서 난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삼류 포르노 소설에나 등장할 이야기입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창녀였습니다.
라합은 후에 살몬과 결혼하여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다윗의 조모 룻은 또 어떤 여자입니까?
남편과 사별한 과부에다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영순위에 들어가는 이방인 모압 여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신성한 독생자 아들을 이처럼 부도덕하고 타락한 조상들의 혈통을 통해 오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데 인간의 타락과 죄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했습니다.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은 죄 짓도록 허용했다는 말입니다.
죄 가운데 있어야만 긍휼을 베푸실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24장 1절에,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인구 조사를 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행입니다.
이제까지 다윗 왕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다윗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왕중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감동하사 인구 조사를 하게 만듭니다.
인구 조사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제국의 영광이 얼마나 힘이 있고,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 없이도 이 힘으로 앞으로 나라를 다스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하게 하게 되고, 인구 조사를 하고 난 후에 다윗은 자신이 한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보내어 다윗의 악행을 책망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면서 다윗에게 그 벌칙을 택하라고 합니다.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인지?
석 달 동안 대적에게 쫒길 것인지?
삼일 동안 전염병이 퍼질 것인지?
다윗은 전염병을 택합니다.
그 전염병으로 인해 칠만 명이 죽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인구 조사를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충돌질해서 인구조사를 시켜 놓고 잘못을 다윗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벌을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귀한 그릇으로 만들어졌거나 천한 그릇으로 만들어졌거나 그릇은 지은 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질문할 위치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책임을 다윗에게 물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죄를 범케 하여 잘못을 깨닫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여 평생 그 은혜만을 의지하고 감동하면서 살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왜 아버지는 탕자가 유산을 가지고 나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고 그 유산을 다 허비하고 죄 짓고, 거지가 되어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도 제대로 못 먹는 신세가 될 것을 알면서도 집을 나가도록 허용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을 죄를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계획입니다.
탕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달았습니다.
아들의 지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참 아들로 거듭난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구 나사로가 병든 것을 보고 즉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지 아니하시고 이틀을 계시던 곳에서 유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기 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렸습니까?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 되어야 부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나사로는 평생 부활의 감격 가운데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죽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건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어 인간을 심히 죄 되게 하여 죽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이제 분명해 집니다.
불택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십니다(롬2:6-12, 롬3:19-20)
하지만 택한 자들에게는 율법을 통해 심히 죄 되게 하시고 그 죄로 인하여 죽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인해 자신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왜냐면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아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대신 못 박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살았습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신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습니다.
이는 신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부활하신 주님의 영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과 죄의 관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로 죄가 되는 줄 알게 하고 죄인이 되게 하여 죽게 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선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 구속의 은총에 감동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 시대에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일점일획이라도 가감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자가 지금도 율법 아래 살아야 하는가 은혜 아래 살아야 하는가 짤막한 비유를 통해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아주 오래 전 한국에서 월간 조선에 한 감동스런 스토리가 실렸습니다.
워낙 오래 전 일이나 이름을 잊어 버렸습니다만 실화입니다.
무기징역수가 어느 해 대한민국 국전에 동양화 대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은 어느 겨울 고즈넉한 시골 눈이 내리는데 논길을 한 아주머니가 머리에 다라를 이고 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떡을 이고 가는 어머니”였습니다.
무기수의 사연과 국전에 당선된 그림이 월간 조선에 실려 그 그림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중학교 미술교사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교사 형이 살인을 저질렀는데 함께 있다가 엉겁결에 형을 도와 준 것입니다.
결국 형은 사형을 당했고 동생은 무기징역을 받게 되었습니다.
홀어머니가 계셨는데 그 어머니는 떡 장사를 하면서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이 무기수는 청송교도소로 이송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따라 청송으로 이사를 하고 떡을 만들어 행상을 하면서 아들의 옥살이를 뒷바라지해 주었습니다.
무기수 아들은 한 겨울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은 대한민국 국전에 대상으로 뽑혔습니다.
아들은 감옥에서 어머니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먹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율법이 얼마나 폭군인지 아십니다.
두 달 전에 아프가니스탄 북부 쿤두즈주(州)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시드카라는 열아홉 먹은 처녀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나이 많은 한 남자에게 신부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미 카이얌이라는 다른 남성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시드카는 이 청년과 함께 파키스탄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탈레반의 엄격한 이슬람 율법이었습니다.
시드카와 카이얌은 탈레반 이슬람 율법사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남녀는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 투석 장면이 동영상으로 공개되어 저는 그것을 봤습니다.
얼굴이 가려진 시드카가 1.2m 깊이의 구덩이에 갇혀 있고, 여러 명의 주민들이 그녀에게 주먹만 한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 번 돌에 맞은 시드카는 쓰러졌지만 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탈레반 대원 한 명이 3발의 총을 쏴서 시드카를 사살(射殺)했습니다.
다음엔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카이얌이 끌려나오고 성난 군중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쓰러진 뒤 곧바로 숨을 거뒀다.
율법이 이런 것입니다.

강남에 대표적인 장로교회를 담임하면서 모 신학교에서 강의까지 하는 어느 목사님이 ‘구원 그 이후 ’라는 책을 냈습니다.
저도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탐독을 했습니다.
그 책의 골자는 ‘구원 얻은 성도들은 생활윤리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얼마나 비성경적이며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오는지 모르는 채 많은 교회들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생활윤리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율법 아래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쿤두즈주에 들어가 살라는 말입니다.
자유가 없고 법과 정죄와 죽음이 기다리는 세계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주님을 믿으면서도 율법과 죄의 공포 속에서 질식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 보려고 애를 쓰는 성도일수록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율법에 짓 눌려 살게 됩니다.
무슨 재미로 교회에 나옵니까?
교회 나오는 이유가 맘 좀 편하고 기쁘려고 나오는 것인데 오히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을 율법으로 옭아매어 꼼짝달싹하게 못 만들고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안하면 벌 받는다는 식으로 하니까 젊은이들이 교회를 다 떠납니다.
재미없잖아요.
밖에 나가면 얼마나 재미나는 일이 많은데 왜 교회 와서 질식을 당하겠습니까?
교회는 바깥세상보다 더 재미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자유와 능력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그것 못 주니까 세상에 나가 맘껏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의 생활윤리는 율법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이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율법에서 해방시켰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마서 6장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무기수와 어머니의 사이에 생활윤리는 법이 아닙니다.
세상이 아들을 살인자라고 정죄하고 감옥에 가두더라도 어머니에게는 아들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들의 죄가 클수록 그만큼 어머니의 사랑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아들을 위해 청송으로 이사하여 추운 겨울날 떡을 이고 팔고 다닐 만큼 아들에 대한 사랑이 큰 것입니다.
어머니가 무기수를 향한 생활 윤리가 있다면 사랑입니다.
무기수인 아들이 어머니를 향한 생활 윤리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은혜를 깨달은 무기수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가 있습니다.
무기수와 어머니와의 생활윤리는 세상의 법을 초월한 윤리입니다.
은혜와 사랑의 윤리입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의 윤리는 율법이 결코 아닙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주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 속에서 나오는 행동이 곧 생활윤리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왜 주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기겠습니까?
내가 주님 사랑한다면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좋지 왜 주님을 떠나서 다른데 놀러 가겠습니까?
내가 주님 사랑한다면 어떻게 주님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살인합니까?
내가 주님 사랑한다면 어련히 주님이 알아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실 것인데 왜 남의 것을 훔칩니까?
신약시대 성도의 생활윤리는 신자들을 꼼짝없이 잡아매고, 정죄하고, 벌을 주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게 하여 스스로 하게 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와 구원 이후에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의 기쁨을 잃게 되었습니다.
진리에서 떠나게 되자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도 성경을 읽지 않고 배우지 않기 때문에 성경보다 어떤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상과 신앙철학이나 학설을 따라가게 됩니다.
‘율법과 죄의 관계’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율법이란 바로 우리의 본질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택한 자들에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하여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들어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에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충족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충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로 하여금 찬양토록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은혜를 느낄 때, 사랑을 느낄 때 인간은 최고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낄 때 인생은 최고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라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멘!

<구역공과 나눔>

1. 율법의 두 가지 용도는 무엇인가?

2.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죄도 허용하실 수 있는가?
  그 실례들을 성경에서 찾아 보자

3. 내 삶에 일어 났던 죄악과 상처와 실패를 통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진
  사건이 있다면 나누어보자

4.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간을 죄되게 하고 죄인되어 죽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가기☞JKM778.COM☜World Live Casin○ 5년연속 무사고▶JKM778.COM◁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2)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수집거부  |  사이트맵  |  온라인문의
Add : 구글지도에서 '샬롬 프레지던시 스쿨'을 입력하시면 찾아오실수 있습니다
Add : 2F Shalom Presidency School, Golf Course Extention Road, Sec 56 Gurugram
Tel : 조영태 목사 (98995 76389) E-mail : seesatman@naver.com/
Copyrignt www.gurgaon.or.kr Reserved. made by woo020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