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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농부의 비유 (전철민 목사)   13-10-14
jcmm   8,152
 
막 12장 1~12  포도원 농부의 비유
 
 오늘 말씀은 비유입니다. 그리고 11장과 연결이 되는 내용입니다. 11장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성전을 깨끗이 하신 주님께 무슨 권위로 일을 하느냐고 질문했을때. 주님은 (11:33절)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그 답변이 오늘 12장의 말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를 놓고 멀리 떠납니다. 주인은 소출을 받으려고 자신의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농부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는데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까지 죽입니다. 결국 포도원 주인은 돌아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시키게 될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과 이 소작농 이야기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을 담은 사건입니다.  당시에는 조국을 떠나서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온 각지로 떠난 사람들 그것을 디아스포라 라고 합니다. (흩어진 사람들)

이 이야기를 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것이 자신들에게 겨냥한 이야기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자신들의 비유이기 때문에.
이 비유에서 한 사람, 즉 주인은 -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농부들은 종교 지도자들. (성전안의 기득권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종들은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주인이 포도원의 소출을 농부들에게 맡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선민의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 곧 선지자들을 보내십니다.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핍박합니다. 특별히 4절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라는 표현은 마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이 목 베어 죽임을 당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포도원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을 때 농부들이 그를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어떠한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인지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비유를 들은 그들은 자신들이 농부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해왔던 일들이 낱낱이 비유에 그대로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핍박했으며 마지막 세례요한 까지 목을 잘라 담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1:18절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의논했던 그들의 마음까지 예수님은 꽤뚫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밝히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1. 그들의 상태 (1절)
주님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무엇을 지적하려고 하신 것일까요?  첫째는 그들의 상태입니다.
 이 비유에서 농부들이 종들을 능욕하고 때리고 죽이며, 상속자인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7절에 보면 -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라고 말합니다. 언뜻보기에 포도원을 얻고자 하는 탐심과 탐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탐심과 탐욕보다 먼저된 원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농부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 마 21:33~46, 눅 20:9-10 )  특별히 마태복음에 보면 마 21:34 -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41절 -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아다.
 주인은 열매를 거둘때가 되었기 때문에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 때에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그들이 탐욕과 탐심을 가진 이유는 제 때에 열매를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이사야 5:1절에 보면 이 포도원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포도원은 기름진 땅에 만들었고 그들은 들포도를 맺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그들은 땅도 기름진 땅을 가졌고 나무도 좋은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못맺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한 농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명분만 앞세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탐심이 가득해졌습니다. 즉, 이 비유는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고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하나님 믿는 자들. 명분론자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탐심이 아니라, 가짜 하나님의 백성들. - 말만 하나님, 하나님, 율법, 율법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들은 정작 주인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사실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특권층인 그들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3절에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자 그들은 4절에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여 더욱 나쁜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악의 절정에 이르러 5절에 그들을 죽이고 말았다  하나님의 뜻인줄 모르기 때문에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공경하는 대신 더욱 격분했으며 아들을 잡아 죽이기 까지 합니다.  - 이 모습은 탐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인과 관계 없는 자들, 명분만 내세우는 자들에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대 부흥의 주역 조지 휫필드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노천 설교로 유명합니다. 야외 설교. 그가 노천 설교를 할 때마다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몇 천 명씩 몰려들었습니다.
 그가 노천 설교를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영국 국교회의 목사들의 반대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 국교회 목사들은 휫필드가 거듭남 혹은 중생의 교리를 설교한다는 것 때문에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강단에 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성경에 없는 교리를 설교한다는 죄목으로 제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휫필드가 대법관에서 소환당했습니다. -  무슨 권한으로 허락도 없이 이 동네(브리스톨 교구)에서 설교하냐는 것입니다.  개인의 집에서 설교하는 것도 교회 법을 어긴 것이다 라고까지 했습니다.
 교회의 법을 정해 놓고 거기에 위배 되었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자가 문제라는 것이죠.

 휫필드가 한가지 반문했습니다. 사역자가 술집에 자주들어가거나 카드 놀이를 금하는 교회의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기는 사역자들은 왜 처벌하지는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대법관은 그것은 누군가 그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정작 그 당시 심각했던 사역자들의 방탕한 생활은 누구하나 거론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았고, 올바른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휫필드는 목사들이 정해놓은 틀과 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법을 어겼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국교였던 시기이지만, 영국 국교회가 깊은 영적인 잠, 침체에 빠져있기 때문에. 명분만 앞세우고 있었던 현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그 당시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의 신앙인 사회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명분만을 앞세우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상실했을까요?  명분론 때문입니다. 교회 오래 다니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믿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정작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처럼, 교회 안에 내가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목사님들, 장로님들도 예수 안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땐 충격이었는데, 제 눈에도 이런 분들이 정말 보였습니다. 오늘 비유의 농부들이 진짜 농부들이 아니기 때문에 탐욕과 탐심이 드러나는 것처럼. 교회 안에 명분으로 시작되는 크리스찬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 봉사도 명분, 선교도 명분, 헌금도 명분.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 가면, 실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모습을...  오늘날 목사라는 신분으로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면서 사기치고, 폭행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우리 자신 또한 명분만 앞세우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 교회가 얼마나 명분을 앞세웁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명분을 얼마나 앞세우고 있는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채워져 있는 것 처럼 과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차라리, 솔직한게 좋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은 참 권위자.
또한,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밝히시는 것이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켰냐고 했지만, 11장에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 스스로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하신 아들이라고 선포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권위는 하나님 아들의 권위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제까지 보냄을 받은 종들과 같지 않습니다.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제까지의 종들은 제한된 사명만을 부여받고 왔지만 그는 주인과 동일한 권세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까지의 선지자들처럼 사명을 부여받고 오신 것이 아니라 권세자로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요17:22)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 동일하신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자신에 대한 그들의 죽이려는 음모가 자신을 보낸 포도원 주인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임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성전을 지배하던 부패한 자들의 권위가 충돌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밝히시는 것은 지금 이 비유의 말씀은 짧은 내용이지만, 출애굽부터 예루살렘 멸망 때까지 유대 민족의 역사가 적나라하게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1500년 동안 하나님이 저희를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첫 번째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민족을 특별히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영적인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구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땅을 약속 해주셨고, 그곳으로 그들을 이끄셨으며, 하나님의 율법과 의식을 주셨습니다. 더 크고 강한 국가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애굽, 앗수르, 헬라, 로마를 제쳐두시고 볼품없는 약소국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을 제사장 나라 삼아주신 것이며.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특권입니다. 그들이 선해서도 아니요. 가치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이유없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오늘 말씀에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6절에 보면 -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 말씀은 다른 대안으로 아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궁극적 방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종들이 폭행과 능욕, 심지어 살해 당하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런 상황에 자기 아들을 보낼 사람은 없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보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 유일한 대안, 최후의 방법임을 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특별한 사랑. 그것은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희생하시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 지금은 저와 여러분이 영적 이스라엘이신것은 알고 계시죠. 선택받은 우리.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자비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불평을 할 때가 많지만, 생각해보세요. 왜 이슬람 국가나 인도가 아닌. 이교도가 많고 우상 숭배가 많은 곳이 아니라, 복음이 가득한 우리 나라에서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런 저런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게 하셨을까요? 인도라는 황무한 이 땅에 왔는데, 왜 구르가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하셨을까?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하거나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값없이, 이유없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그 은혜를 보실 줄 알아야 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여러분을 향한 손길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교만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고,  은혜앞에 무조건 겸손하셔야 합니다.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이 비유는 지금까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종이 맞고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보냅니다. 그 종은 머리에 상처가 나서 능욕받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을 보냅니다. 그 종은 시신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종들을 계속해서 보냅니다. 그리고 아들까지 보냅니다. 주인은 끊임없이 종들을 보내는데 이것은 주인의 오래 참는 성품 하나님의 인내의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구약을 깊이 있게 자세히 보시면, 구약성경은 반복되는 인간의 반역과 거역, 그리고 반복되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기록되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인간은 창세기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매번 무너뜨리고 벗어나기 일쑤였습니다. 노아의 홍수사건과 곧이어 일어나는 바벨탑 사건이 인간들의 반역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또한, 믿음의 조상 이라는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도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며 이끌어가시지만, 계속해서 못믿고, 반역하고, 약속까지 파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때 마다 약속을 주시고 덮어주시며 이끌고 가십니다. 뿐만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보세요. 광야생활도 그러하고, 여호수아 전쟁때도 그렇고, 남유다 북이스라엘로 나누어졌을 때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은 메시지를 주시고, 또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시면서 용서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향해서 참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장)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오래 참으시고 계시다는 생각, 체험해 본 적 없으십니까? 저는 제가 이렇게 사는 것이 기적이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제 안의 죄들을 보며 실수들을 보면, 하나님은 저를 버리셔도 수없이 버리셨을 것입니다. 지금도 저를 왜 붙드시고 계시나? 나 같은 것을 왜 붙잡고 계시나 생각할 때가 솔직히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저의 죄의 모습을 따라 취급하지 않으시고, 저의 불법을 따라 갚으시지 않으시며, 수없는 반역과 거역, 실수에도 오래 참으시는 주님이시라는 결론밖에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이 특징입니다. 감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한 주간의 생활, 1년의 생활 아니 지금까지의 삶을 관찰해 보세요. 참으셔도 너무 참으십니다.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반역, 거역, 반항, 주님을 대항했던것. 오래 참아 주십니다. 그 기다림을 묵상하면 감격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심판의 하나님 (9절)
그리고 이 비유는 결국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경고에 있습니다.
9절 -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포도원 주인의 결정은 농부들에게 내리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마지막에 자기의 아들 마저 보내었지만 그 아들까지 죽여 버린 이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포도원 주인이라면 이럴 땐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지 않겠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멸의 순간, 진노의 순간, 마침내 심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본문의 비유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십니다.
 주인을 배척했던 농부들은 결국, 그들 자신이 배척을 당할 것이며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가 박탈되어 진멸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시면서 이름만 교인, 그리스도인 명분론자로만 그친다면, 즉,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자로 끝난다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도 불구하고 결국 심판이 찾아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최후의 심판을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 나오시면서 하나님과 관계된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필요한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셔야 합니다. 인생은 어떤 인생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4)  건축가의 버린 돌의 결과.
 결국, 10절 말씀의 -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시 118:22을 인용한 예언의 성취입니다.

여기서 표현한 머릿돌은 주춧돌과는 다른 건축의 맨 마지막 과정에서 기둥 꼭대기에 쐐기처럼 박는 돌이라고 합니다. 건축물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예수님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의 아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죄 없이 단지 농부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살해당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아무런 죄없이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버린 돌처럼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님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의 희생을 통해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되게 하셨습니다.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은 취급을 받으셨던 주님을 그 희생위에 머릿돌처럼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안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만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식적인 종교에 익숙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속에서 그분안에서 출발 될 때 우리의 삶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끌어가시고 다루셨는지 말씀하시며, 또 우리에게도 핵심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짧은 비유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셔서 특별히 택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자신까지 내어 주시면서 희생하시기까지 사랑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중하고 귀한 사역을 지금 여러분 모두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하나님의 백성된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계속 넘어지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지금도 살아갑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은 오래 참으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계속 용납하시고 기다려 주시며, 돌이키라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만 지어져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혹, 교회다니면서 신앙생활 하시면서 명분만을 앞세웠던 우리의 모습.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을 버리시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지어져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전철민목사) 
요한복음강해(12) 세상의 구주를 알게 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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