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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7)/율법의 용도, 죄의 필요성   11-04-14
jcmm   4,480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7)
율법의 용도, 죄의 필요성 / 롬5:20-21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시리즈 설교를 금주에 끝내려고 했습니다만 결론 부분이 보다 더 크리어하게 되어야 한 치 의문이 남지 않을 것 같아 다음이 부활절이지만 한 주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결론 부분이 부활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잘 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SBS의 시사프로인 ‘현장 21’에서 ‘한기총 사태’를 집중 취재하여 공중파 방송을 하여 그것을 본 많은 일반 시민들이 한국교회의 부패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한기총’이란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로 한국교회의 각 교단들이 가입한 그야말로 한국교회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년직 회장에 당선되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의 돈을 뿌리는 것이 관행이 되 왔고, 이번에 총회에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전 회장단이 이미 당선된 회장을 법원에 고발하여 직무정지를 시키고 양방 간에 법정 공방과 싸움이 계속되는 모습이 그대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는 "개신교 역사상 지금 한국교회만큼 부패한 교회가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최근 은퇴한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도 “오늘처럼 목사 된 것이 그리고 기독교인이 된 것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습니다”고 참담해 했습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장인 정운형 목사는 “이번 SBS 보도 내용은 한국 기독교의 윤리 수준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고 했습니다.

‘율법과 죄와 그리고 은혜’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인의 윤리’문제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기독교인의 윤리로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한기총 사태를 위시해서 계속되어 온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총체적 부패가 자주 드러나면서 그 가르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교육이 잘못되면 삶이 잘못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율법이 기독교인의 생활윤리가 아니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그렇게 강조하고 탄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나 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교리의 사슬에 얶메어 꼼짝달싹하지 못하다 보니까 잘못된 윤리관을 가르친 결과 오늘날 개신교의 윤리가 실종이 된 것입니다.

율법을 생활윤리로 지키게 되면 두 가지 결과가 나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 되고 맙니다.
바리새인만큼 경건주의가 없습니다.
속은 썩어 문드러져 있어도 겉만 거룩한 종교인의 탈을 쓰고 사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성격이 담대한 교인들은 바리새인 쪽으로 갈 확률이 많습니다.
한기총에서 놀고 있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되건 말건 종교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탐욕을 챙기는 가롯 유다가 되기를 서슴치 않는 모습들을 우리들은 지금 보고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들은 심각한 죄의식과 죄책감에 빠져 우울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우울증 환자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통해, 복음을 통해 자유와 기쁨을 얻는 것이 정상인데 결코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생활윤리로 지키라고 하니까 율법의 노예가 돼 버리고 맙니다.
그 사슬이 싫어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제가 계속 강조하잖아요.
교리를 배우기 이전에 성경을 먼저 공부하라고요.
개신교에서 율법을 기독교인의 생활윤리로 고집하는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율법을 세 가지 용도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인들의 ‘생활윤리’로 둘째는 죄를 깨닫게 하는 용도로 셋째는 악인을 심판하는 용도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 생활윤리로 지키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 교리를 집대성한대서 크게 평가를 받습니다.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 무려 5년 7개월 동안 151명의 평신도와 121명의 성직자들 총 273명이 모여 1,163회의 토론을 걸쳐 완성이 되어졌습니다.
대단한 신앙고백서입니다.
그 회의에 참가했던 대표들은 초교파로 모였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학자들도 있었고 정반대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알미니안 학자도 있었고, 성공회 신부도 있었고 정치가들, 평신도 대표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회의의 최종적인 채택을 위해 서로의 입장 차이를 끝까지 고수할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양보 할 테니 너는 이만큼 양보해 달라‘는 합의가 있었습니다.
성경진리를 각자의 신앙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협작에 의해 이루어진 일부 고백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지울 수 없는 상처이기도 합니다.
율법도 그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충분한 연구와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생활 윤리로 지키라는 것은 과거 중세 천주교회의 가르침이었는데 종교개혁자들이 한편으로는 교황청과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문제들을 수습하느라 거의 수정 없이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특히 칼빈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루터와 종교개혁을 함께 했던 독일 귀족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인간의 행동을 규제할 법이 필요한 것을 느꼈습니다.
칼빈은 또한 법학박사였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성경을 충분히 고찰하지 않고 법학자의 눈으로 구약 율법을 생활윤리 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종교개혁 직후에는 워낙 중세 천년이 암흑시대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같은 것들은 빛을 발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촛불도 밝은 것입니다.
지금은 환한 대낮입니다.
촛불 가지고는 밝힐 수가 없습니다.
자유주의나 인본주의나 저급한 신비주의들이 마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빛을 태양처럼 밝게 비추면서 성경진리를 파괴하고 있는데 옛날 촛불로 그들의 빛과 싸워 이기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충분히 고찰하지 못하고 내린 교리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같은 것들에서 잘못된 부분들, 미진한 부분들을 후대 사람들이 수정하고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웨스트민스터 같은 교리들을 성경보다 위에 두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으니까 개신교 신학의 율법 문제를 아직까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혼란을 겪고 있고, 일반 성도들에게는 기독교 윤리문제에 대해 정확한 답변을 못해 주니까 한기총같은 윤리실종 사태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교리서나 신앙고백서도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율법의 용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I. 율법의 용도

1.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용도
율법을 잘 지켜 의롭게 되거나 구원을 받으라고 준 것인가?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 잘못된 가르침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율법도 지키다가 큰 혼란에 빠진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서 율법의 용도를 설명하면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기 이전에 이미 악이나 죄가 있었습니다.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3:5)
문제는 그런 유혹을 받았을 때 ‘따 먹을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 내면에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악성’입니다.
그 ‘악성’이 실재 행동으로 나타나면 그것이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자 하는 생각이 죄이고 따 먹은 행동이 범죄입니다.
그래서 ‘죄’와 ‘범죄’에 대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금과법 명령을 주시지 않았다할찌라도 따 먹은 행동은 범죄입니다.
하나님 싫어하시는 것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명령을 줌으로써 따 먹은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제가 이해하기 쉽게 델리 구르가온 톨게이트 비유를 들잖아요.
태그를 사용하는 라인과 현금을 내고 빠져 나가는 라인 둘입니다.
태그를 사용하는 것은 시간 절약을 위해서 우리나라 ‘하이패스’식으로 미리 통행료를 지불하고 테그를 사용해 그냥 통과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태그가 없는 차량들이 빨리 통과하기 위해 태그 라인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놈들이 모르고 들어오는지, 놈들이라고 안 하고 그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분들이 모르고 들어오는 것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들어오는 것인지 하여간 잘못된 것입니다.
빨리 갈려고 태그 라인으로 들어오는 분도 잘못이고 돈을 받는 직원분도 잘못인데 전혀 의식이 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쪽으로 들어오는 차량은 벌금을 열배를 물리고 돈을 받는 직원분도 해고 시키는 법을 만들어 놓으면 태그가 없는 차량이 태그 라인으로 들어오는 것은 범법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즉 법이라는 것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이미 죄와 범죄가 세상에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 범죄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주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깨달은 죄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을 주셔서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2. 죄로 죽게 하기 위한 용도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인간을 살리시려고 주셨는지 죽이시려고 주셨는지 정답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만일 살리시려고 율법을 주셨다면 반드시 율법을 잘 지켜 의롭다 함을 얻거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킬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 사람이 의롭게 된다거나 구원을 얻으라는 라는 성경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율법을 범하여 멸망당했다는 것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말씀은 허다하게 많습니다.
율법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주신 금과법은 아담을 살리시려고 주신 것인지 죽이시려고 주신 것인지?
죽이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지진, 쓰나미, 원전사태....심지어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이 새 집에 이사 가서 쥐 잡으려고 쥐약을 과자모양으로 보기 좋게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거실 중앙에 잘 보이게끔 놓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쥐약을 놓으려면 어린 애의 손이 미치지 않는 장롱이나 싱크대 속에 감추어놓지 거실 한 가운데 먹기 좋게 놓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왜 먹고 죽을 선악과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만들어 동산 중앙에 나게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짓도록 허용했다는 데는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열이면 열 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허용 정도가 아니라 창세전에 이미 다 의도 되었다는 것을 지난 강의를 통해 충분히 설명을 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역시 율법을 주셔서 율법을 범함으로 죽게 만드시고 가나안에서 쫓겨나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7장 9-11절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율법 아래 나게 하시고 율법의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갈라디아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율법을 주셔서 죄로 심히 죄 되게 하시고 죄로 인하여 죽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세한 결론은 조금만 뒤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죽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야만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인식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기 전에 얼마든지 예수께서 살릴 수도 있겠지만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 될 때까지 주님께서 오히려 기다리셨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평생 산다는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쁘게 살았습니다.
그것이 인식의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저도 인도 병원에서 감염이 되어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죽을 준비를 다 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 사모도 작년 11월 달에 댕기 피버로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해적에게 총 맞은 석해균 선장이 패혈증으로 혈소판이 70,000으로 떨어져 위기 상황이라고 발표 했었는데 우리 사모는 16,000 으로 떨어 졌습니다.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인도 사람 피를 여섯 개나 받아도 별로 차도가 없었는데 우리 성도들 피를 몇 개 받으니까 혈소판이 올라가 살게 되었습니다.
피는 임마누엘 성도 피가 좋습니다.
정말 하나님 은혜로 살았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살아가는 기분이 남 다릅니다.
밥 먹고 살고 있다는 평상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고 삽니다.
깨닫고 사니까 부부 사이도 더 좋아지고 교인들을 대하는 마음 가짐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식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살리기 위해서 죽이시려면 죄가 필요합니다.

지난 온 삶 속에서 일어 났던 숱한 실패와 상처와 범죄들.....
하나님의 허락 없이 내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의 범죄로 인해 나는 심히 죄인 되었습니다.
그 죄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죽음에 넘기어졌습니다.
잘 된 것입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율법의 모든 저주로부터 내가 형벌을 받고 죽어야 하는데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내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갚을 빚이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도 더 이상 내게 무엇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내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서 오직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먼저 율법으로 인해 정죄를 당하고 죽어야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죄를 필요한 것입니다.

II. 죄의 필요성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섭리해 나가시는데 있어 ‘죄’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만일 죄가 하나님의 섭리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가정할 경우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지 않는 죄가 도대체 어디서 들어 왔단 말인가?
하나님 몰래 어떤 일이 일어 날 수 있는가?
사단이 죄를 인간 세상에 도입해 왔는가?
그래서 나온 이단 사상이 이원론입니다.
‘하나님은 착한 신이고 사단은 악한 신이다’
이 세상을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대립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 방향으로 통치해 나가시려는데 방해꾼 사단이 나타나 꼭 하나님의 계획을 망칩니다.
이것이 최대의 이단인 초기 이원론 사상인 영지주의자들의 정체입니다.
오늘날 이런 이단 사상에 물들어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영생하는 것이었는데 사단이 나타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바람에 원래 계획이 절단이 나고 급하게 후속 조치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즉 사단이 하나님을 이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단도 통치하고 죄도 통치합니다.
잠언 16장 4절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가롯 유다가 없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성경대로 팔리고 성경대로 고난을 당합니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알리기 위해 사단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의 마음을 악하게 하여 요셉을 팔아먹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연단시키기 위해 사울 왕에게 악신을 보내고 마음을 악하게 만드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단과 악과 죄를 사용하시는가?

1. 은혜로 살게 하는데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의로 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시려는 데 죄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만일 인간 스스로의 의로 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게 됩니다.

로마서 11장 30-32절에,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다는 말씀은 곧 죄 아래 가두신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갈 때 누군가 건져 주면 그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더구나 나를 건져 주고 그 사람이 죽었다면 그 은혜를 더욱 더 감사하게 됩니다.

로마서 5장 20-21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은혜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율법으로 범죄를 더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백만 원을 빚지고 있다가 탕감을 받고 살 때와 백억을 빚지고 있다가 탕감을 받는 것은 탕감해 준 사람에 대한 은혜의 정도를 다르게 느끼게 됩니다.
빚을 많이 탕감 받을수록 더욱 은혜를 크게 느끼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면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을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63:17)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주의 길에서 떠나게도 하시고 주를 경외하지 않게도 하시는 분이심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임한 증거입니다.
하나님 은혜 감사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도가니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은혜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창세기 15장 13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녀가 하나도 없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백세에 이삭을 낳고 그리고 그 손자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총리가 되고 그 가족들이 애굽에 이주해서 사백 년 만에 수백만 인구로 증가 되었고, 노예 살이 고생 고생하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출애굽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생활에 죽겠다고 부르짖어서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셨습니까?
아니잖아요.
이미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해방을 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됨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70년 바벨론 포로생활 속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었기 때문에 해방을 시켜 주신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이미 바벨론 포로가 되기 전에 70년 동안 포로생활 하게 될 것이라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게 하셨고 70년 만에 정확하게 해방이 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은혜로 살게 된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우리가 저지른 온갖  범죄들, 상처들, 실패들 잘 된 것입니다.
그 터널을 지나왔기에 지금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은혜로 살게 하시는가?

2. 은혜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죄의 일차적 필요성은 은혜로 살게 하는데 있습니다.
근본적 필요성은 은혜를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탕자는 집을 떠나기 전에는 아버지의 은혜를 몰랐었습니다.
몰랐다고해서 아버지의 은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은혜는 늘 있었습니다.
다만 탕자가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창세전부터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만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배은망덕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하는 방법을 집에서 내 보내는 것입니다.
집을 나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랑방탕하게 허비하고 온갖 죄를 다 짓고, 실패하고 병들고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면 비로소 아버지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집에 돌아 온 탕자는 불평불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감동으로 살게 됩니다.
감동은 마음의 평강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시켜도 맡겨 주신 것 자체가 은혜로 알고 감사함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일을 시켜 주시는 아버지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우리도 창세전부터 우리를 은혜로 택해 주시고 그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죄인 되게 하셨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으로 구원 받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감동이 오게 됩니다.
감동은 마음의 평강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 내가 기뻐지게 됩니다.
내가 기뻐지면 주변의 사람들이 기뻐지게 됩니다.
내가 행복해지면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윤리 정신입니다.

오늘 결론부분으로 ‘율법의 근본적인 용도’ 그리고 ‘죄의 필요성’을 살폈습니다.
다음 주에 마지막으로 ‘은혜의 궁극적 목적’을 이해하게 되면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의 관계가 정립이 되고 이것이 정립이 되면 여러분들 모두 가 성경과 바른 기독교 신앙의 토대 위에 서서 진정한 자유와 평강으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 구역공과 나눔 >

1. 율법을 생활윤리로 지키게 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가?

2. 신약시대 성도들의 생활윤리 정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3. 하나님께서 죄를 무슨 목적으로 섭리하시는가?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8) 은혜의 궁극적 목적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6)/ 죄와 은혜(3)/죄와 은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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