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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8) 은혜의 궁극적 목적   11-04-18
구르가온   4,104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8)
은혜의 궁극적 목적 / 시19:1~6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여덟 번에 걸친 시리즈 설교 마무리를 끝내면서 두 가지 소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자 성도님들에게 빚을 갚은 느낌입니다.
여자 성도님들은 수요 성경공부도 있고, 파트별로 여러 성경공부반도 있고, 또 구역예배도 있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데 반해 남자 성도님들은 주일 낮 예배 외에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없습니다.
물론 부부구역이나 남구역 예배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조금 나은 편이기는 하지만요.
이번 시리즈 설교는 사실 남자 성도님들을 위한 설교였습니다.
일 년에 한 두 차례 정도 남자 성도들을 위해 이런 성경강좌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두 번째는 인생과 목회에 좋은 멘토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번 설교는 저의 작업이 아니라 저의 멘토가 되시는 박용기 목사님의 저서인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를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것뿐입니다.
성경해석과 신학의 방법론에 있어서 오직 성경에만 기초를 둔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가르침과 열정을 주시는 박 목사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늘 빚진 마음입니다.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의 맥을 짚게 되었다’는 말과 거의 흡사합니다.
이 말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맥이 통합니다.
물론 이 방대한 분량을 여덟 시간 만에 끝내기 때문에 엑기스만 공급을 받은 상태라 물 타는 작업은 여러분의 몫이라고 자주 언급했습니다.
바라기는 교회 홈 페이지에 설교 전문이 실려 있으니 잘 인쇄해서 파일로 보관하여 자주 읽으면서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스무 번 이상 읽어 보세요.
아마 앞으로 여러분들의 신앙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고 성경적 세계관이 확립이 되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도 열리게 되리라 믿습니다.

지난 주일은 ‘율법의 용도’와 ‘죄의 필요성’까지 살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 잘 지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성경의 증거를 살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심히 죄 되게 만들고 또한 그 죄로 인해 죽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인생인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 값을 대신 다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갚아 주시고 우리를 의인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와 기쁨으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런 은혜로 살게 하시고 그런 은혜를 깨닫게 하시려고 율법과 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즉 최종적으로 살리기 위해 율법과 죄가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일본 원전 참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원전 주변 사방 20키로 내에 사람들이 다 철수 했습니다.
그래서 개 고양이 소 돼지 동물들이 굻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거의 다 죽었습니다.
동물애호가들이 피폭을 무릅쓰고 들어가 먹이를 주고 있는데 택도 없이 부족하지요.
문제는 줄에 묶여 있는 개들을 풀어 주면 개들은 알아서 먹이를 찾아 먹기 때문에 살 수 있는데 그 줄을 풀어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법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쓰나미로 차들이 널려져 있는데 치울 수 없는 이유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법에 걸리기 때문에 치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뉴얼에 의해 움직이는 일본인들이라고는 하지만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나 죄의 근본적 필요성을 알지 못하면 줄에 묶여 있는 개처럼 율법이나 죄에 매여 죽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은혜의 궁극적 목적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제까지의 강의는 오늘 결론을 위해 필요했었습니다.
율법 문제나 죄 문제가 최종적으로 귀결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 타락한 죄악 세상 가운데서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벌거벗고 부끄럽고 겁에 질려 무화과나무 밑에 숨어 있는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홍수로 인류가 멸망할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풀어 방주를 만들어 살게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단지를 만들어 팔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나 언약하신 대로 ‘자손과 땅과 통치’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처럼 은혜를 베푸시는가?

I.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라고 했습니다.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면 먼저 찬송할 일이 생기게 해 주어야 찬송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여 무조건 찬양을 받으셔야 속이 풀리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지극히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나 사랑도 강제적으로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깨닫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 바다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혀 있는 사면초가가 되어 죽는 줄 알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고 물을 다시 합치게 하자 그 뒤를 쫓아오던 애굽의 군대가 물속에 수장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따라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찬송을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상황 자체가 찬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찬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이 없어도, 아니 우리가 없어도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시는 자충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역사 섭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찬양케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이방민족을 들어 때리셨다가 해방시킴으로 싸 메실 때 그들이 찬양했습니다.
범죄한 백성들을 이방민족의 침입 받고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하셨다가 해방시켜 그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죄를 범한 백성들의 나라를 잃게 하셨다가 회복시키실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창립 16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16년 전 교회를 개척하면서 고생했던 생각을 하면 지금은 찬양이 저절로 나옵니다.
세 가정이서 개척을 했는데 개척 한 달 만에 한 가정은 한국으로 귀국해 들어갔고, 한 가정은 봄베이로 발령을 받아 갔고, 한 가정 남았습니다.
주재원들이 들어오면 다 큰 교회로 갔습니다.
임마누엘 교회 삼 개월 안에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대사관 직원 가정수가 13 가정이었는데 대사님을 위시해서 전체 13가정이 다른 교회를 나갔습니다.
대사관에서 공공연하게 교민사회에 두 교회가 필요 없다고 문 닫으라고 압력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개척에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 정도가 아니라 확률 제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인도에서 제일 큰 한인교회로 세워주셨습니다.
서남아 지역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로 세워주셨습니다.
해마다 더 부흥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서 찬양하는 게 아니라 찬양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기 때문에 찬양합니다.
두란노 아카데미, 장학사업, 설교 아카데미, 개척교회 후원,
그리고 서남아 전 지역을 향한 비전....
찬양할 수밖에 없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찬양토록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만족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이 없어도 자충족 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찬양토록 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자식을 키우고 있는 여러분들은 자식들이 어떨 때 행복합니까?
자식들이 돈 벌어 용돈 안 줘도 괜찮습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 좋은 것입니다.
부모 마음이 어느 때 무너집니까?
자녀가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늘 어둡고, 늘 병들고, 늘 가난하고, 늘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면 억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입니다.

II.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찬송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은혜를 베푸시는 일차적 목적이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계시입니다.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았다면 그 선물 자체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선물을 받았다면 그 선물을 주신 분의 마음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선물 받은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와 구원의 선물을 주셨다면 거기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을 주신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그 분에게 감사하면 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인도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볼 수 있는 해돋이는 다이질링이 타이거 힐입니다.
새벽 캄캄할 때 지프차를 타고 타이거 힐에 올라가 태양이 뜨기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산맥 사이에 붉은 빛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 빛에 장엄한 산들이 자태를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떠오르는 태양 맞은편에 갑자기 거대한 산맥이 드러나면서 최고봉은 마치 분홍 물감을 뿌려 놓은 듯이 연분홍빛으로 덮입니다.
태양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면서 연분홍빛이 사라지고 서서히 눈 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해가 떠오를수록 그 빛 앞에 히말라야의 장엄한 산들이 다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 영광이 온 세계에 비추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그 분이 통치하시는 역사 세계를 보고 다윗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는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라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1-33)

바울은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이처럼 장엄하게 온 세상을 비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장님은 눈을 떠도 안 보이고 눈을 감아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영혼의 눈을 열어 줍니다.
열린 영혼의 눈으로 이 창조세계와 역사 세계를 그리고 나를 통치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는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믿어지는 사람들은 이 은혜의 세계에 자신을 던져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속에 자신을 던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자신을 던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던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 속에 자신을 던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을 던져 버립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바울처럼 인생을 시로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기대를 가지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누구를 만나게 하실까?
오늘도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주실 것인가?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인가?
직장 생활에 기대가 되고, 사업하는 것이 기대가 되고, 사역하는 것이 기대가 되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니까 우주가 운행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니까 들에 풀이 다니고 새가 날아다니고 짐승들이 숲에 살고, 강이나 바다에 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니까 내가 이나마 움직이고 있고, 직장 다니고, 사업하고, 공부하고,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영광계시의 최고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오셨기 때문에 은혜이고, 그의 죽으심은 인간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기 때문에 은혜이며, 그의 부활하심은 인간의 의롭다 하심을 위함이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그의 승천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함이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자비성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계시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하나 할 수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자비성의 영광을 계시하시는가 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된 것으로서 하나님이 왜 존재하시는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모세에게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서 내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 왕 손에서 건져 광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답 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3:14)고 했습니다.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종적인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그의 자비의 영광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비추실 때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인간은 마땅히 입을 다물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비성에 의해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영광만을 찬송하면서 기뻐할 따름입니다.
그 앞에서 기뻐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죽이는 율법을 명하시고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죄 가운데 가두셨다가 죄 아래서 벗어나게 하여 은혜로 살려주셔서 스스로의 영원한 자비성의 영광을 계시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서신서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음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2)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범죄했기 때문에 은혜로 구속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속하시려고 범죄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 스스로의 자비성의 영광을 계시하시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이 영광을 본 성도들은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감사하고 찬양하는 아름다운 마음에 죄악성이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속에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크리스찬의 윤리가 되어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의 관계를 깨닫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속에서 영원토록 자유와 평강의 삶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복음 그리고 복음을 위한 사명 (전철민목사)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7)/율법의 용도, 죄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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