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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 강해(10)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조영태 목사)   14-07-26
조영태목사   4,253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다니엘 5:17-31

 사람들은 자기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특히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는 명확한 기준이 없이 자신의 가치관과 의지 감정에 따라서 좋고 나쁜 것이 판단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얼마나 유한하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탁자모서리에 있는 꽃병을 쳐서 떨어뜨렸을 때 떨어뜨린 사람은 꽃병을 위험하게 누가 여기다 두었지? 라고 반응하고 꽃병을 둔 사람은 왜 그리 조심성이 없이 걸어다니지? 하고 반응합니다. 도로를 건너는 보행자 일 때는 갑자기 차가 들어 올 때 운전자를 욕하게 되고  운전하는 운전자 입장에서는 저 사람이 차를 못봤나? 차에 치일려고 하는가? 하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이처럼 매우 개인적이거나 이기주의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잠언 21:2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는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생각 할 때는 다 옳은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부족해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저울이 나를 달아보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달아볼 때가 많고 다른 사람도 나를 달아본다는 것을 의식하는 분이 좀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재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적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벨사살왕의 글을 해석하면 큰 상급과 나라의 셋째 치리자의 자리를 주겠다는 선언에 대한 다니엘의 대답으로 시작됩니다. 17절입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

17절은 물질에 좌우되지 않는 다니엘의 청렴결백성과 하나님의 뜻만을 선포하려는 다니엘의 강직한 성격 및 담대함 신앙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선포할 내용이 축복이든 저주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진리만을 증거 하겠다는 선지자적 결의와 왕에 대한 충정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8-21절에서 다니엘은 글에 대한 해석을 하기 전에 느부갓네살 왕의 예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주심으로 세상의 백성들과 나라들이 그를 두려워하였고 그는 사람을 임의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왕위를 폐하고 그를 낮추어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게 하였고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게 하셨습니다. 그 때서야 느부갓네살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신의 뜻대로 그 자리에 누구든지 세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22-24절에서 다니엘은 벨사살 왕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알고서도 마음을 낮추지 않고 자신을 높여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잔으로 흥청망청 술을 마시는 데 사용하고 또한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신상들을 찬양하고 왕에게 호흡을 주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선지자의 사명이 없으면 감히 절대 권력자 앞에서 그런 선포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벨사살 왕의 잘못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성전기명을 가져와 흥청망청 술 마시는 데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여겼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23절에 보면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우상의 특징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못 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 지금도 만물을 운행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죄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가지 더 강조합니다. 교만입니다. 그것은 알면서도 겸손해지지 않은 교만입니다. 22절에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더 높이며” 부왕 느부갓네살이 교만함으로 하나님께서 징계하셨고 그로 인하여 짐승처럼 지내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음에도 마음을 낮추지 않았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눅12장 47절 48절에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은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3:1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고 말씀하는데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혼인집에 갔던 주인을 등불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 하면서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면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주인이 와서 엄한 처벌을 내릴 것이라는 맥락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르고 맞은 일을 한 사람은 적게 맞지만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않고 그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은 더 많이 맞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은 혀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서 포커스를 맞추면서 선생이 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인데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아지고 잘못된 것을 가르칠 때, 남을 가르치는 지위에 있는 어떤 선생 된 자가 거짓 가르침을 전한다면, 그는 신자들의 그룹을 파괴시킬 수도 있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어떤 특권을 바라고 선생이 되려는 자들에게 더욱 경계의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사람은 두렵고 떨림으로 주의 말씀과 그의 교훈을 말하고 자신도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세 또한 사도행전 17장의 베뢰아의 성도들처럼 귀를 기울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렇다 할 때는 아멘으로 화답하며 또한 말씀을 받고는 이 말씀이 진실로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교회 생활의 우선순위가 다른 환경적인 것, 인간관계보다도 바른 복음의 말씀으로 꼴을 먹어 내 영혼을 살리고 그 생명의 말씀으로 가족과 이웃을 살리는 복음의 합당한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는 것에 만족하지 마시고 성경공부나 기도회 등에도 열심히 참석하시고 개인적으로 시간을 따로 떼어 성경읽기와 기도생활도 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맥락에서 하반기에는 남성성경공부와 청년양육 등 말씀을 배우고 나누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회에서도 수련회와 특강을 통해서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시간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한국교회가 말씀과 기도 외에 너무 외적인 프로그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본질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결국은 한국교회가 쇠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임마누엘 교회도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고 듣는 교회의 책임을 충실히 해 나가야 할 것이며 또한 내 안에, 다음세대인 자녀들과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에 대한 내용과 확신이 있는가도 늘 점검하고 살펴야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24절에서 손가락이 나와 이 글을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 밝히고 25-28절에서는 벽에 기록한 글자와 글자의 뜻을 해석합니다. 그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었고 히브리 음역으로 이 말의 뜻은 ‘셈하고 셈하고 저울로 달아보았다. 그리고 부족하여 나눈다’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메네’는 ‘숫자를 셈하다’라는 뜻이고 ‘데겔’은 ‘무게를 달아 본다’는 뜻입니다. ‘바르신’은 ‘나눈다’는 뜻이고 ‘우’는 연결사로, ‘그래서’ 라는 의미입니다. ‘메네’ 를 두 번 반복한 것은 벨사살 왕이 지은 죄악의 무거움을 뜻하고 동시에 아주 정확하게 숫자를 셈했기 때문에 재고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며 벨사살 왕의 시대를 계수하여 끝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데겔은 벨사살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는 의미인데 정확한 측량의 도구인 저울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정확한 통치원리를 따라 공의롭게 재판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삼상2:3 “여호와 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욥 31:6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레스’는 히브리어 음역으로 복수형인 ‘우바르신’ 대신에 쓰였는데 그 뜻은 ‘왕의 나라가 나뉘어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입니다. 결국 이 손가락이 쓴 글의 뜻은 심판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셈과 저울에 함양미달이었던 벨사살왕은 그 날 야음을 틈타 유브라데 강바닥을 통하여 바벨론을 기습했던 바사의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심판의 메시지가 급박하게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이방나라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 것은 유대인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해주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기준과 판단 앞에서 자유 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하나님께서 철저한 잣대를 가지고 저울에 달아본다면 그 어느 누구도 그 분 앞에 당당하게 설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판단하시고 받아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의 모형입니다. 구약시대의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양이나 소를 가져와 그 제물에 안수하고 직접 제물을 잡습니다. 안수하는 것은 그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의 모형입니다. 구약시대의 신실한 백성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영원한 제사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인 십자가 죽음에 참여한 것으로 간주해주셨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얻은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 죽음으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모든 제사의 기초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한 속죄제로써 사죄를 구하는 사람은 제물로 드려질 짐승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레1:3-5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 자신의 죄로 인해 대신 죽을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짐승을 제사 드리도록 제사장에게 넘깁니다. 이는 그 짐승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기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제물의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고 불태워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받으시고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이와 같이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함 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대신 제단 위에 제물이 되신 것이며, 십자가에서 그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꼭 이렇게 하셔야 했습니까? 꼭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 위해서 피와 물을 모두 쏟아내시기까지 그토록 비참한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적당히 용서해 주시거나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되는가? 하나님께서 사랑이 없으신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11세기의 저명한 대주교였던 안셀름은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에 대해 아직도 죄의 심각성과 죄의 결과의 엄중함에 대해 모른다고 하면서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도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모른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도 모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할 때의 사랑은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어떤 흉악한 죄인도 용서하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그러나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공의입니다. 이것을 합쳐본다면 ‘거룩한 사랑’, ‘공의의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이지만 기준이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그대로 참아보시지 못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죄인을 그대로 받아 주실 수 없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1:17 상황에 따라 인간의 성품이 바뀔 때도 있지만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성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보다 덜 진실하거나 덜 자비롭거나 덜 의롭거나 덜 선하게 될 수 없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자비하심, 죄에 대한 적개심을 말하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변함없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짐승들을 통해서 죄인을 용서해주셨고 신약에서는 완전한 제물이신 예수님을 받으시고 죄인들을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심판받아야 마땅한 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는 이 사랑이야말로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는 분이며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이 말씀은 때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지만 너무나도 변화무쌍하고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때에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하신다면 우리들은 구원의 확신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조금 잘못하면 안되겠다. 구원취소 영생은 없다하시고 처음부터 다시 한다면 신앙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럽겠습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조건을 알고 지킬 수 있고 마음에 평안과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함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그리고 그 기준은 우리가 도달 할 수 없는 기준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뤄주신 기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울에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달아 지기 때문에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며 심판이 아니라 영생이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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