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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11) 푯대를 향하여   14-12-15
조영태목사   4,100
 
빌립보서 강해 (11) 푯대를 향하여
 
                                                                                                                  빌 3:9~14

한 때 한국교회에 휩쓸고 간 책과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이라는 도서입니다. 책의 저자 릭 워렌 목사님과 새들백 교회는 한국에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인생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 속에서 창세전에 선택되었고 이 땅에 목적을 가지고 보내졌다고 강조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하기 위해서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향해 달려갈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우리에게 골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바로 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3:8절에서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고 또한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그 분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분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려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이 가진 족보, 혈통, 종교적 표식인 할례와 지적인 능력 등 자신의 육체의 것으로 자신을 평가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평가되어 왔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은 정말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살아가는데 굉장히 가치가 있고 유용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알게 되는 일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에 동참한 자들이 십자가위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되는데 자신이 가진 것으로는 전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붙들었던 율법의 의는 하늘의 속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결국은 썩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과 하나가 될 때,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그분의 의가 내 안에 들어오게 되고 나는 그분의 것이 되어 결국에는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간절히 알고자 함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0절을 보면 바울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진실로 주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더 닮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주님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싶었습니다.
체험적으로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시는 사망이 지배하지 못하는 영원한 부활이며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난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끊으셨고 죄의 결과인 사망의 쏘는 것을 깨뜨리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 우리를 옳아 매며 죄 아래에 끌어내렸던 사단과 영적세력들을 무장해제 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후13:4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의 부활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심을 믿는 모든 믿는 자에게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떠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우리의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전15:42~44   
여기서 썩지 않는 다는 것은 부활의 몸은 더 이상 물리적 부패나 노화에 종속되지 않는 몸을 뜻하고 욕된 것으로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는 죄로 인하여 죄의 병기로 사용되었던 우리의 몸이 주님의 부활의 영광으로 몸을 입고 영광스러운 몸 영광의 주님을 비추는 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사도바울이 믿음으로 본 것은 바로 이러한 부활한 영광의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잘 알았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 분의 고난을 몸서 본받음으로 부활에 이른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정확한 의미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그 고난은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지만, 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견디고 있는 그리고 주님을 믿음으로 또한 그분을 증거 함으로 인하여 받는 모든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죽음의 고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체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지만 그 구원의 여정에서는 주님을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삶 속에서 받는 고난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신 것처럼 신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인해 내 안에 예수님이 살게 되고 예수님의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러나 사도바울은 아직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을 받는 승리자의 상에 아직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부활했지만 아직 완전한 부활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자신은 구원받은 자로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2절 하반부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붙잡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맞습니다. 그동안 자신은 세상과 자기 자랑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는 주님께 붙잡혔습니다. 그리스도의 연합은 내가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시작되거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으셨고 지금도 그분께서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연합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붙들고 간다면 얼마나 불완전하겠습니까?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차를 초보드라이버가 운전한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그분 손에 붙들려서 천국까지 들어가는 것임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잡는 것’ ‘달려가는 것’ 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잡다’는 것은 ‘붙잡다’는 의미입니다. 경찰이 강도를 잡을 때 잡는 것처럼 강하게 붙드는 것입니다. 매우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잡다는 것은 또한 늘어뜨린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몸을 다 늘려서라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그는 헬라경기를 염두에 두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경기자들이 열심과 인내를 가지고 경주하는 모습, 앞에서 뛰고 있는 선수를 잡으려고 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여러분 100M 달리기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마지막 피니시 라인에서 몸을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0.01초를 줄이려고 가슴을 최대한 앞으로 내밀면서 도착선을 통과합니다.
생동감이 넘치지 않습니까?
사실 많은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영적인 거인으로 봤습니다. 실제로 그는 완전한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올라가야 할 영적 고지가 있었습니다. 거룩해 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열심히 달려갔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달려 갈길 중 이미 다 끝마친 부분입니다.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습니다. 사람의 칭찬도 있었을 것이고 책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손해 본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해서 아쉬운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까지 달려온 것은 잊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경주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것 푯대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장 62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좇으면서도 세사 일에 미련을 두는 자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서 보면 롯과 가족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악의 도시 소돔을 멸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그 곳에 살고 있는 롯의 가족을 구원하시기로 하십니다. 그래서 그 곳을 멸하기 위해 명을 받은 천사들이 롯의 가족을 이끌어 냅니다. 그리고는 창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고 했습니다. 
소돔에 임할 유황불 심판이 대단히 광범위하고 심각했기 때문에 롯의 가족은 급히 서둘로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야 했고, 또 죄악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소돔 성에 대해 아무런 미련을 갖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중한 상황 속에서 롯의 아내는 성에 남아있는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곧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창19:26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는 후대에 세상에 미련을 둔 사람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달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십시오. 그리스도 없을 때 받은 것, 이루는 것은 이 땅에서 잠시 필요한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푯대를 향하여’ 라는 말은’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란 말입니다. 신자들이 똑바로 쳐다볼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이는 경주자가 골인 지점을 똑바로 바라보고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름의 응한 사람, 끝까지 경주한 신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이임을 믿어야 할지니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부분에서는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신앙의 인격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온전한즉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명적인 부분에서는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
여러분 인도에서 인도 땅을 밟으면서 인도사람을 만나면서 이곳이 선교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고 선교지를 후원하는 것도 좋지만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선교에 동참하는 것도 매우 좋은 일입니다. 이번 기회에 임마누엘 선교회원 또는 오병이어 선교회원으로 헌신하여 인도와 서남아시아 선교에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듯 물질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돕는 사람과 교회 그리고 지역을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후원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전문적인 선교사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해도 우리의 각자의 영역 직장과 학교 또한 비즈니스 영역 속에서 살아가는 ‘사는 선교사’라는 믿음을 가지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 부르심에 순종하며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히브리서 12:1~2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두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많은 선배들은 우리들이 신앙의 경주를 하는데 있어서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앞에 당한 경주를 감당했습니다.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은 주도권을 쥐시고 죄로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며 거룩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역시 성령의 중재적 사역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비록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들 편의 선택과 능동적인 행동인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 앞으로 나아오는 기적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입니다. 당시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가나안땅으로 출발했습니까? 사도행전에서는 그 사건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하시니” 행7:2-3 라고 말씀했습니다. 먼저는 영광의 부르심이 있었기에 그 땅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 앞에 순종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에게 준비된 것은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급이었습니다. 푯대를 바라봤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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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절기를 지키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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