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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 (7) 언약궤를 빼앗긴 이스라엘   15-07-17
조영태목사   4,931
 
언약궤를 빼앗긴 이스라엘 / 사무엘상 4:1-22

본문은 사무엘서 기록중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투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 블레셋은 아벡에 진치고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강한 블레셋 군대에게 패하며 사천 명 가량 죽임을 당합니다.
남은 군인들이 진영으로 들어오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하게 했는지
안타까워하면서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오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3절에 여호와의 언약궤는 증거의 궤, 주 여호와의 궤라고도 불렸던 장방형 상자였습니다.
언약궤의 뚜껑에는 양 옆에 서로 마주보고 날개를 펼치고 있는 두 그룹이 있었으며,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신 10:1)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히 9:4-5)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막을 만들게 하셨고 그 중심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안치했습니다.
지성소에 있었던 언약궤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출25:22절에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곧 사람들을 보내서 언약궤를 가져왔습니다. 올 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같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진영으로 들어오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치며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궤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궤가 들어오면서 사기가 충천한 이스라엘과 반대로 블레셋 진영은 매우 긴장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궤가 들어온 것이 신이 들어온 것으로 여겼고 그들이 들었던 대로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지휘관들이 병사들에게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고 독려했습니다.
예전에 자신들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의 종이 되지 않도록 죽을 힘을 다해 싸우라고 했습니다.

곧 2차 전쟁이 벌어졌는데 결과적으로 블레셋의 거센 공격 앞에 이스라엘 군은 대항하지 못했고 도망하면서
삼만 명이나 죽임을 당하고 크게 패하고 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기까지가 1-11절까지의 간략한 스토리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봅니다. 언약궤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에게 대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방인에게 빼앗기도록 내버려두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과 전쟁하기에 앞서 대제사장 엘리를 위시하여 제사장들이 회개하였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또한 첫 번째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원인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고 실로에 있는 법궤를 그 전장으로 운반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실로와 에벤에셀은 직선 거리로 50~60km나 되는 거리였습니다. 그 말은 이동하는 시간이 꽤 걸렸다는 것이고 그 시간에 자신들을 돌아보고 성찰했다면 2차 전쟁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곧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고 올 때 홉니와 비느하스도 같이 따라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엘리의 두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름만 제사장이었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배교자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을 경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당시의 이스라엘의 최고의 종교지도자처럼 형식은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회개하지 않은
그들의 그런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더욱 가증한 것이었기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아닌 언약궤 자체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과 장로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언약궤를 전장으로 내보낸 엘리는 노심초사하며 그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서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장로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기를 원했습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언약궤 자체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생각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당시 이방 사람들의 미신적인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다는 것을 대변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극히 거룩한 물건이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런 것이지 만약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로들의 말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이 지극히 이기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절 중반부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우리에게로 가져와서 우리 중에 있게 하여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짧은 구절에 우리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말은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관심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입니다. 매우 인본주의적인 태도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그 언약궤의 힘을 빌어서 복을 얻는 것 곧 요행을 바라는 것이며 언약궤 자체의 힘을 의지하는 주물숭배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에 힘이 있는 것처럼 숭배하거나 절하는 것을 주물숭배라고 합니다. 지금도 토속신앙으로 돌이나 나무에 영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 31장에 야곱이 가족들과 라반의 집을 도망쳐 나올 때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해서 가져나온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드라빔은 나무 목각 인형같이 생겼는데 가정 수호신 같은 것이며 그 드라빔을 소유한 자에게 상속권도 주어지는 물건이었습니다. 라반의 가정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에 얼마나 많은 주물사상이 있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든지 주물숭배 사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 또는 성경책 자체가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구약에서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로마시대의 십자가는 부끄러움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그것이 바로 죄의 크기, 죄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하고 처참한 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의 결과는 부끄러움이며 십자가에 죽는 것과 같은 처참한 심판인데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서
우리는 용서를 받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의미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리가 기도를 하고 나서 마지막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고 붙입니다. 이것도 의미를 알고 해야 합니다. 주문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의 이름은 인격과 특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특성은 구원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할때 첫 번째,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동기와 내용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 이렇게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은 오랜 기간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케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자 19:13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들린 자들에게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고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행하곤 했습니다. 그러자
15절에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그들이 상하여 옷을 벗고 도망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귀신을 쫓아낸 다는 사람들은 바울이 행하는 능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신 명단에 예수님을 올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흉내 내는 것으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이러한 미신적인 신앙이 팽배해있었습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 앞에 나를 산 제물로 올려드리는 것이지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언약궤에 매여 있으시겠습니까?
외부적인 법궤의 이동에 따라서 하나님도 운반되신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경기를 할 때 잘하는 사람 센 사람을 자기 편에 붙여서 이기고자 하는 심사하고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자신의 편에 이동시킨 것입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링컨의 일화가운데 하나를 소개합니다.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 전쟁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남군에는 막강한 지휘관들이 많았고 반면 유능한 지휘관 부족으로 북군은 계속적으로 남군에게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민심이 분열되고 일부 진영에서 탈퇴의 기미가 엿보이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패전 소식에도 링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했습니다. 오직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북군의 전세가 크게 불리할 때 참모가 말했습니다.
“각하!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주실까요? 걱정입니다.”

그때 링컨은 말합니다. “오직 나의 염려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일세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서 있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네.”
하나님께서 나의 편으로 서계시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왔기 때문에 복을 받거나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4:5

세 번째 언약궤를 가져오고도 패한 이유는 블레셋 군대의 지휘관들이 용맹스럽게 지도했기 때문이고 또한 언약궤 앞에서도 마음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쟁은 당시까지도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절에 보면 블레셋이 먼저 싸움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2절에서는 블레셋 군대는 이미 항오를 정렬하고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들어와 군사들이 동요할 때도 사기를 잃지 않고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고 하면서 지휘를 잘 하는 것을 봅니다.
두려움이 사람들을 사로 잡을 때 담대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입에서도 나왔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얼마나 담대해야겠습니까?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잠 28: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결론적으로 이 전쟁은 하나님께로 말미 암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군대에게 붙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사기의 연속선상에서 그들의 죄와 무지함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준비되었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엘리가문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엘리는 길곁 자기 의자에 앉아서 전쟁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궤를 내보낸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과 전쟁결과에 대한 불안함이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깊이 빠져 버리면 그 죄 때문에 닥쳐오는 환난 가운데서 자기의 문제를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55:6-7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고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19-22절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스라엘의 패전 비보를 듣고 갑자가 해산하고 죽고 맙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사실에 탄식했습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영광이 없다’, 또는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 야말로 당시 사사시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사람입니다. 타락한 가족들 중에서 고요히 탄식하던 숨은 성도였으며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했던 경건한 성도였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의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흑암의 역사 속에서도 빛줄기를 남겨두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쓴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당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영광의 주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광채와 빛남을 의미합니다.
그 분의 소리는 온 우주에 퍼져있으며 그분은 여전히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득차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영광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상 강해 (8) 언약궤 앞에 무릎 꿇은 블레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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