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LOGIN

MEMBER LOGIN

 
히브리서강해(2) 히브리서 개요   11-06-08
구르가온   4,139
 
히브리서 강해(2)
히브리서의 개요/1:1-3

앞으로 매주 설교의 요점을 주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주보에 나와 있는 히브리서 전체의 개요를 펴 놓으시고 오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의 기록 목적은 유대인 성도로 하여금 유대주의 즉 구약의 율법주의를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당시 유대주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오늘날 왜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불신앙과 의심 속에서 살게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불신앙과 의심은 신앙성장에 치명적입니다.
마치 자라나는 새싹 위에 돌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고 자랄 수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강해는 우리 신앙성장을 가로 막고 있는 돌덩어리를 치우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기록 목적은 또한 유대주의와 그리스도 예수를 비교하여 줌으로 왜 우리는 유대주의를 버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 예수’를 선택해야 하는지 독자 스스로가 판단하게끔 이끌어 줍니다.
“그 까짓것 유대주의가 뭔데 버리면 될 것 아닌가?”
당시 유대인 그리스찬들에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유대주의는 곧 민족이며, 국가며, 사회며, 사업이며, 직장이며, 가정입니다.
이북에서 김정일이나 김정은에 대해 어떤 이유로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간 사형을 당하든지 형무소로 보내져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이북에서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곧 국가며 민족이며, 사회며, 사업이며, 직장이며, 가정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북에 살면서 김정일이나 김정은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밝혔다가는 체포되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인 핍박을 받았고, 유대교로부터 종교적인 핍박을 동시에 받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로마라는 세상 제국이나 유대주의라는 민족적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그리스도 예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기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8-9절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알게 되면 그분을 의지하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누구를 의지하든지 아니면 무엇을 의지하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무신론 철학의 뿌리는 니체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니이체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인간세계의 도덕을 부정했습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가진 자들이 자신들이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영적 자유를 위해서는 신을 부정했습니다.
성경의 신의 명령을 인간을 구속하는 장치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외침으로 신의 명령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니체의 선언은 전 유럽을 열광시켰고 열병처럼 세계로 번져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현대사회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정신세계를 장악했다는 말은 철학과 문화자체를 장악했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인 인간 니체가 스스로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고 독립했을 때 그는 미칠 수밖에 없는 정신적인 혼란에 부딪쳐 결국 미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무엇인가 의지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마치 엄마 배속에 있는 태아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니체처럼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어느 누가 자기 의지로 태어났습니까?
어느 누가 자기의 성별을 골라서 태어났습니까?
어느 누가 자기의 민족을 골라서 태어났습니까?
어느 누가 5분 후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자기의 죽는 날을 정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처럼 모든 것을 자신이 다 할 수 있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 말씀처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숨 못 쉬면 죽습니다.
소화 못시키면 죽습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죽습니다.
우리가 애를 써서 숨을 쉽니까?
애를 써서 소화를 시킵니다.
우리가 스스로 백혈구 수를 증가시킬 수 있습니까?
그런 사소한 것도 조절할 능력이 없는 피조물이 자신을 창조주처럼 착각하는 것은 정신균형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의지할 권세자이신 하나님을 모를 때 인간은 의지할 대상이 전혀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살게 됩니다.
조석으로 변하는 인간을 의지하고 살기도 하고, 돈을 의지하고 살기도 하고, 심지어 의지할 대상이 없다보니 짐승을 의지하고 살기도 합니다.
강아지나 고양이 새끼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하고 사니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허무하겠습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마땅히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때 평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무한하신 용서와 무한하신 은혜와 무한하신 공급하심을 받고 살 때 두려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시고 사랑으로 충만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때 두려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마땅히 의지해야 할 탁월하신 예수님에 대해 유대주의와 비교해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주의하면 크게 세 가지 그룹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체입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센파입니다.
율법사, 서기관, 랍비들은 바리새파에 속한 학자들입니다.
이들 세 그룹은 유대사회의 기득권자들입니다.
사법, 행정, 인사등 절대 권력을 소유한 그룹들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실질적으로 유대 사회를 이끌고 가는 그룹들입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모세 오경을 포함하여 6,000 여개의 규례를 만들어 놓고 가르치고 지키라는 그룹입니다.
만일 지키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체포하여 형벌을 가할 수 있는 그룹입니다.
이들은 철저한 율법주의, 경건주의, 형식주의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이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 한 가운데서나 성전의 입구에 서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무리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겉보기에 거룩한 성도 같지만 속은 무덤 속에 있는 시체처럼이나 냄새나고 부패했다고 예수님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율법주의가 잘못되면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경건주의나 형식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겉으로 예수 믿는 모양을 철저히 지킨 독일 경건주의의 시발점인 할레대학에서 후에 성경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신학이 바로 그 대학에서 태동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도덕종교나 율법종교로 가르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교회가면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생활에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데 교회에서까지 덤터기 짐을 지게 하면 성도는 어디서 쉼과 평안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절대 우리에게 짐을 지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11:28)
교회가면 몸과 마음이 편해져야 하는데 술도 못하고 담배도 못 피고, 주일날 어디 놀러도 못가고, 십일조 내라고 하고, 건축 헌금하라고 쪼아 대고, 안내면 죄 짓는 것 같고.....
지켜야 할 룰이 왜 그렇게 많은지?
저도 지겨운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제게 기독교를 가르쳐 준 목회자들은 한결같이 기독교를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종교 내지는
유교와 같은 도덕종교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탁월하신 예수님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율법이나 도덕 정도를 가르치면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탁월하신 예수를 알게 되면 그분을 의지하게 됩니다.
마땅히 의지할 분을 의지하고 살면 천하 없이 편한 마음으로 삽니다.
내 욕심대로 안 되니까 마음이 불안하고, 염려와 걱정이 생기는 것이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그분 뜻대로 되가는 것이니까, 창세전부터 이미 나의 갈 길을 다 정해 놓으시고 그 뜻대로 인도하시니까 뜻대로 되어 가고 있는데 걱정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고 안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지금 안 되고 있는 것인데 뭐가 걱정입니까?
지금 안 된다고 나중에 안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안 되다가 나중에 깨닫고, 경험을 얻고 나서 잘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가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 잘 되는 것입니다.
맘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탁월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 그래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뒤집어져도 주님이 통치하심이 믿어지니까 걱정대신 기도가 나오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어떠한 현실의 문제도 해결을 할 수 있습니다.

탁월하신 예수님을 알게 될 때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감사와 감격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이름 높이고 하나님 이름 높이니까 내가 행복한 것이고 내가 행복하니까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고 이타적인 삶을 배우고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탁월하신 예수를 깨닫게 될 때 감사하니까 복 주시는 하나님께 십일조 할 마음도 생기고, 선교하고 봉사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탁월하신 예수를 알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헌금하라고 하고, 봉사하라고 한들 하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반발만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목회 방향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공부하자!
성경대로 믿자!
성경대로 살자!
탁월하신 예수님 깨닫고 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으면 좋고, 일할 수 있으면 일하니까 본인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아직 못 깨달아서 할 맘이 없으면 깨달아 알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고, 본인이 못 깨달아 혼란 속에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면 본인이 답답한 것이지 누가 답답하겠습니까?
이제 내가 교회 다니니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겠는가를 배우려고 하지 말고 먼저 탁월하신 예수님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은 율법주의나 도적주의가 아닙니다.
탁월하신 예수님 깨달으면 예수님 닮아 갑니다.

사두개파는 천사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모세 오경 이외는 성경으로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부유층 귀족, 제사장들의 가문이나 정치에 참여한 권력층입니다.
종교생활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신학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성경을 기독교의 텍스트 내지는 경전으로 정도 밖에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교회가 무너졌고, 미국의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고, 미국 교회를 판에 박은 우리 한국교회는 더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목회자들이 나온 미국의 풀러 신학교 리처드 마우 총장은 지난 4월 8일, 자신의 블로그에 "힌두교인도 불교도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경우도 있다. 이 입장은 나뿐만 아니라 알버트 말러 미남침례교신학교 총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 교계의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미남침례교는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이며 그간 보수적 신학의 보루였는데 이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너지면 신앙이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설교하지 않고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부지기수입니다.
성경책 펴 놓고 본문 읽고 설교를 한다고해서 다 하나님을 말한다고 착각하면 큰일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인지 인간이성의 산물인 하나님을 가르치는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별하기 힘듭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탁월하신 예수님을 사회혁명가로 가르치기도 하고, 노동 운동의 선구자로 가르치기로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의 신으로 가르칩니다.
폴러 신학교의 마우 총장처럼 탁월하신 예수님을 힌두교나 불교나 이슬람교에서 믿는 잡신이나 범신의 하나로 믿습니다.
그래서 종교일치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종교를 존중해 주어야 하지만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 외에 구원을 주는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모독하는 것이고 성경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마우 총장과 같은 견해를 가진 교회가 절반 정도 됩니다.
그들이 기독교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 밑에 있는 교인들은 성경의 절대적 영향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하나의 경전 내지는 기독교생활의 텍스트 정도 밖에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내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믿지도 않고 안 믿으니까 신앙과 삶이 따로 따로 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사두개인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게 되면 반드시 성경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바로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성도는 감동을 받습니다.
온전케 됩니다.
선한 일을 하게 됩니다.
이번 방학 때 새롭게 성경교제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부터 중고등부 그리고 장년이 공부할 수 있는 성경공부교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에센파의 특징은 금욕주의와 수도원 생활을 통해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쾌락을 악으로 간주합니다.
결혼을 악한 것으로 여기고 양자를 들입니다.
개인 재산을 용납지 않고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기독교는 세상 속의 종교입니다.
산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치 누룩이 밀가루 반죽 속으로 들어가 빵을 부풀리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칫집 분위기를 도와 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공격할 때 “너희 선생은 왜 그렇게 음식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그렇게 잘 마시냐?”고 공격했습니다.
세속의 일을 악한 것으로 보고 오직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드리고, 교회 다니는 것을 성스런 일로 이원화해서 사는 것이 현대판 에센파입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삶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아서 예언을 해 주는 목사들과 교회들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사업과 결혼과 진학 등 온갖 가정사를 예언해 줍니다.
기독교를 무당종교나 점쟁이 수준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은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고 방언을 말하며 꿈을 꿉니다.
그들은 탁월하신 중보자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직접 하나님과 연합을 시도하고, 직접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는 사이비 기독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당시 유대주의가 탁월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오늘날도 그리스도를 배제한 유사 기독교를 경계해야 합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주보에 나와 있는 히브리서 개요를 보시면 오신 그리스도 예수가 왜 유대주의에 비해 탁월한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장에서 6장까지 예수 신분의 우월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천사를 숭배합니다.
구약시대 천사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게 역할을 했습니다.
천사 보기를 하나님 보기처럼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유대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천사보다도 예수님이 얼마나 우월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간디를 국부로 생각하듯이 유대인들은 모세를 정치적인 국부로 섬기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모세 보다 예수님이 얼마나 신분적으로 우월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아론을 종교적인 지도자로 받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그들이 섬기는 아론보다도 얼마나 탁월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 10장까지 예수 사역의 우월성을 증거합니다.
구약시대에 성막과 제사장과 제물은 유대인의 종교생활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형에 불과했습니다.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합니다.
내가 아빠 할게 너는 엄마해라!
소꿉장난과 실제 장성하여 아빠 엄마가 되어 사는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구약은 모형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자는 항상 불완전하여 죄를 범할 때마다 같은 제사를 자주 반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드디어 원형이 오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성전이 되어 주시고, 친히 제사장이 되어 주시고, 친히 제물이 되어 주셔서 단 한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의 얼마나 우월한가를 비교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11장에서 13장까지는 그러므로 구약의 유대주의 즉 율법주의에 비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은혜의 복음이 얼마나 우월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에 메여 고통을 받지 말고 복음 안에 들어와 은혜의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복음의 위대성을 깨닫게 되면 자연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고 선행을 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체 개요를 늘 염두에 두면서 ‘탁월하신 예수님’에 대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를 극복하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봄으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히브리서강해(3)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1) 
히브리서강해(1) / 서론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수집거부  |  사이트맵  |  온라인문의
Add : 구글지도에서 'church of immaculate conception '을 입력하시면 찾아오실수 있습니다
Add : church of immaculate conception in sec 45
Tel : 조영태 목사 9899576 389) E-mail : seesatman@naver.com/
Copyrignt www.gurgaon.or.kr Reserved. made by woo020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