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LOGIN

MEMBER LOGIN

 
아르뱅주의자 느부갓네살 왕   12-09-03
jcmm   4,224
 
아르뱅주의자 느부갓네살 왕 /  단4:1~3

오늘 본문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합니다.

2~3절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왕은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제국의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불러 그 신상 앞에 절을 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를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하자 왕은 대노하면서 활활 타는 풀무불 속에 집어 던졌습니다.

당연히 그 불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야 할 그 세 친구들은 타 죽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셋을 집어 넣었는데 네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네 번째 인물로 인해 세 친구들이 불에 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안 왕은 더 가까이 다가가 그 네 번째 인물을 보면서 왕은 “이는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왕은 그 세 친구들을 활활 타는 풀무불 속에서 나오게 합니다.

불 속에 임했던 네 번째 인물은 사라지고 세 친구들이 풀무불 속에서 나왔는데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았습니다.

이 기적을 목격한 왕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느부갓네살 왕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잊어버렸습니다.

분명 중대한 꿈이었는데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자 전국의 박수와 술사와 술객과 점쟁이들을 왕궁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엄한 명령을 내립니다.

“간밤에 내가 꾼 꿈을 잃어버렸는데 그 꿈을 찾아오고 해몽을 하도록 하라.

찾아오는 자는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얻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꿈을 찾아오지 못하겠다고 하자 왕은 대노 하면서 몇 월 며칠까지 찾아오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선언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 역시 왕의 살생부 명단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날을 잡아 밤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왕의 잃어버린 꿈을 마치 비디오를 재생하듯이 생생하게 다니엘에게 보여 주시고 해몽까지 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왕궁에 들어가 왕을 뵙고 잃어버린 꿈을 찾아 주고 해몽을 하자 왕은 보좌에서 내려와 다니엘에게 엎드려 절을 하며 다니엘에게 꿈을 찾게 해 주시고, 바벨론의 장래에 대해 말씀해주신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합니다.

다니엘서 2장 47절에,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이런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는 느부갓네살은 과연 신자가 되어 구원을 받았을까?




다니엘서 4장에서 왕은 또 꿈을 꾸게 됩니다.

땅 중앙에 한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가 자라서 하늘 끝까지 이르렀습니다.

나무가 크기 때문에 그 나무에는 잎이 무성하고 열매도 많고 각종 새들과 짐승들이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한 순찰자가 나타나더니 그 나무의 뿌리 그루터기만 남겨 놓고 잘라 버리라고 합니다.

일곱 때 동안 그런 상태로 두라고 말합니다.

이 꿈을 꾸고 나서 왕은 다시 번민합니다.

이번에도 전국의 박수와 술사와 술객과 점쟁이들을 다 불러 해몽을 하라고 했지만 아무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부릅니다.

다니엘은 이 꿈을 정확하게 해몽을 해 줍니다.

다니엘의 해몽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왕은 또 다시 하나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합니다.

4장 37절에, “그러므로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왕의 신앙고백을 보면 정말 신실한 신자처럼 보입니다.

우리 중에 이처럼 완벽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연속적으로 몇 년에 걸쳐 신앙고백을 했던 느부갓네살 왕은 신자가 되어 구원을 얻었는가?




아닙니다.

그는 신자가 된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신자의 분명한 표식은 ‘회개’입니다.

‘회개’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회개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탕자는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돼지우리 속에서 지나간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고, 뉘우치고, 눈물 흘리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아버지집의 부요한 것을 누리며, 아버지의 아들로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변화가 없는 신앙고백은 그냥 신앙고백일 뿐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신앙고백을 한 느부갓네살왕을 보십시오.

그는 그가 고백하고 있는 ‘모든 신들의 신이며, 모든 왕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과거에는 몰라서 무너진 성전을 방치했다 할지라도 이런 정도의 신앙을 고백했다면 그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복구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었던 모든 거룩한 기명들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가 그렇게 위대하게 고백했던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그분을 예배하는데 쓰이는 성물들을 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바벨론 왕궁에 보관하고 있었고, 후에 그의 외손자 벨사살왕이 축제를 벌이면서 귀족들과 왕후들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술을 마실 때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오늘 본문 4장에 보면 왕은 다시 꿈을 꿉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크게 번민했습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다니엘을 불러 해몽을 부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을 부른 것이 아니라 먼저 박수들과 술객들과 점쟁이들을 불렀습니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서도 일시적인 신앙고백을 했을 뿐 그의 세속적인 사고와 가치관은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느부갓네살 왕은 진정으로 회개한 적도 없었고, 결코 신자가 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명백한 것입니다.




오늘날 느부갓네살 왕처럼 번듯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결코 회개한 적이 없는 교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한국교회의 최대의 위기는 ‘윤리실종’이라고들 말합니다.

‘윤리실종’이란 말은 ‘회개실종’과 같은 말입니다.




신앙심이 깊어질수록 세상의 보편적 윤리보다 더 고상한 기독교 윤리가 실천이 되어야 하는데 왜 반드시 있어야 할 윤리가 실종이 되어 가고 있는가?

가장 큰 원인이 ‘기독교 구원관’의 문제입니다.

윤리가 실종된 삶을 살아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느부갓네살 왕이 가졌던 결코 신자가 될 수 없는 거짓 믿음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잘못된 구원관이 잘못된 신앙과 삶을 만들어 냅니다.




몇 년 전 한 엽기적인 사건이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한 아버지가 두 아이를 한강에 빠뜨려 죽게 했습니다.

체포된 아버지를 한 앵커가 인터뷰한 장면이 그대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앵커는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를 물었습니다.

살인범 아버지는 살길이 막막해서 그랬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이 대답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답입니다.

앵커는 그럼 왜 같이 죽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이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어서 자살을 못했습니다”

당황한 앵커가 또 물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살인을 해도 괜찮습니까?”

그러자 살인범 아버지는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약간의 정신적인 질환이 있는 것을 우리가 참작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살인범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어떤 죄도 씻을 수 있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이와 유사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는 어떤 죄도 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심각한 고민 없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마치 중세 시대 면죄부만 사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지옥에 있는 부모의 영혼도 연옥으로 올릴 수 있다는 믿음처럼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면죄부를 가지고 무슨 죄를 지어도 씻을 수 있다는 담대한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아무에게나 수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성도들에게만 효력이 있는 피입니다.

에스켈 18장 21~22절에,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자신의 아이를 죽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것이라는 믿음의 착각을 가지고 사는 윤리가 실종된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을 고발한 영화가 ‘밀양’입니다..

신애라는 여자가 남편을 잃고 하나 남은 아들 준호를 데리고 남편이 살던 밀양에 내려옵니다.

불행하게도 아들 준호가 실종이 되고, 준호를 납치한 범인은 아들을 죽이고 맙니다.

신애는 우여곡절 끝에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감옥을 찾아 갑니다.

정말 어려운 결단이고 걸음이었습니다.

범인을 만난 신애는 거의 미치게 됩니다.

아들은 죽인 범인은 감옥에서 그새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준호와 준호 엄마인 신애에게 어떤 죄책감이나 책임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영화는 윤리가 실종된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영화입니다.




느부갓네살왕처럼 신앙고백만 있지 ‘회개’ 나 ‘윤리’가 전혀 없는 잘못된 구원관을 갖고서도 자신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 교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두 아이를 죽인 아버지나,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준호를 죽인 범인과 같은 결코 구원과 거리가 먼 신앙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지금 한강에 녹조 현상으로 비상입니다.

상류부터 시작한 녹조가 지금 중부 이남까지 확산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전국의 강물이 다 녹조로 변할지 걱정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한국교회에 이런 세계 교회사에 없었던 이상한 복음이 녹조처럼 번져  ‘윤리 실종’을 낳고 있습니다.

이런 복음으로는 전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대게 교회사에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큰 구원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칼빈주의 구원관입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공부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칼빈주의 구원관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여 죽은 영혼을 살려 주실 때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다른 하나는 알미니안 구원관인데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하긴 했지만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받아 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스스로가 선택할 문제라고 가르칩니다.

즉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구원관은 나름대로 성경을 근거로 정교한 논리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첫 발걸음을 칼빈주의적인 교회에 나가느냐, 알미니안주의적 교회에 나가느냐에 따라 평생 신앙의 칼라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구원관이 칼빈주의적인 구원관이든, 알미니안적 구원관이든 이 두 구원관은 공히 ‘회개’와 ‘고도의 윤리적 삶’을 가져오게 됩니다.

칼빈주의적 신앙을 가졌을 경우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기로 선택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갖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영적 긴장이 생겨나면서 차원 높은 윤리 도덕 생활이 나오게 됩니다.

17~18세기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럽이 영적 도덕적으로 무장하게 되고, 사회복지가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생겨난 된 원인은 이런 구원관에서 오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자각과 주변의 사람들이 그 사람을 신자로 인정해 주는 것을 통해서 선택된 사람인가를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고도의 윤리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알미니안 신앙을 가진 성도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알미니안 신앙은 지금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비록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이 역시 온전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영적 긴장이 조성이 되면서 끝까지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이 역시 고도의 윤리적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 둘 중의 하나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어야 성경적이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가는 차후에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고민을 해 보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지금 녹조처럼 번지고 있는 ‘회개’나 ‘윤리’가 실종된 느부갓네살왕과 같은 신앙고백과 구원관은 칼빈주의도 아니고 알미니안주의도 아닙니다.

그 신앙에는 어떤 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교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녹조처럼 확산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코 구원과는 거리가 먼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이렇게 급속도로 번지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복음을 크레이그 블룸버그(Craig Blomberg) 교수는 칼빈이즘과 알미니즘 신앙 가운데 문제가 되는 최악의 것들을 조합해서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이 둘을 합친 합성어로 ‘칼미니즘’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국의 신광은 목사는 ‘아르뱅주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합성어입니다.

아르뱅주의 신앙의 특징에 대해 신광은 목사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줍니다.




첫째는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신앙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나의 연약함을 다 받아 주시고, 나의 죄도 다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분이며, 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결국 하나님도, 교회도, 목사도, 교인들도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이기적 신앙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편의주의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나름대로 치열한 논리적, 신학적, 성서해석학적, 윤리적 고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신학은 17세기 네덜란드 돌트 총회 이후 오늘날 까지 첨예한 논쟁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1618 년 11월 13일에 이 두 신학을 토론하기 위해 네덜란드 돌트에서 회의가 있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그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당시 회의 광경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신학논쟁이 얼마나 치열했던 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회의는 국제적인 회의였습니다.

84명의 회원들이 참가했고, 18명의 정부 관료들이 참석했고, 독일, 신성로마제국, 스위스 및 영국에서 온 27명의 대표들이 참석을 했습니다.

이 회의는 무려 6개월간 진행이 되었고 모인 횟수만 154회였습니다.

1619년 5월 9일에 회의가 끝났는데 그 논쟁은 지금까지 계속돼 오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는 자세하게 할 수 없지만 성경공부 시간에 이 두 신학의 대립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 아르뱅주의 신앙은 어떤 고민도 없이, 어떤 연구도 없이, 어떤 원칙도 없이, 성경에서 아무 구절이나 마음에 맞는 구절이 있으면 가져다 인용하고, 칼빈주의나 알미니안주의의 신학도 아무렇게나 가져다가 조합해 만들고, 그냥 편리한대로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되는데로 가는 신앙입니다.

이단보다 더 위험한 신앙입니다.

이단은 표시라도 나지만 이 신앙은 버젓이 교회 안에서 정상적인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더 위험한 것입니다.

셋째는 반지성주의적 특성을 띄게 됩니다.

여기 저기 가져다 맞춘 것이기 때문에 명백한 논리적 오류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건 사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쉽게 하고 있는데도 딱딱하다가 혹 느끼는 분들은 그 동안 어떤 사고도 필요로 하지 않는 설교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쉬운 설교가 뭡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설교 아닙니까?

누가 주일 지키기 위해 가게 문을 닫았더니 매상이 두 배로 올랐다!

누가 집 팔아서 교회에 헌금했더니 하나님께서 빌딩을 주셨다!

새벽기도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했더니 자녀들이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들어가고, 좋은 사람 만나 시집 장가가게 되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




여기에 무슨 사고가 필요합니까?

듣고 그냥 끝내면 되는 겁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이 뭐가 중요하냐?

교리가 뭐가 중요하냐?

십자가의 보혈!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일단 ‘십자가 보혈’만 있으면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씻을 수 있다는 면죄부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르뱅주의자들입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 방문했을 때 어떤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요 그 교회에 포주가 열 명 정도 나온 데요.

주일예배 안 빠지고 헌금도 잘한데요.

몇 년째 나오게 있데요.

담임목사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집창촌에 가서 축복기도를 해 주어야 하는가?




말도 안 되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르뱅주의자들입니다.

오늘은 ‘십자가 보혈’이라는 면죄부를 확보하여 죄를 씻어 나가는 알미니안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고, 미래는 한 번 선택된 영혼은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칼빈주의적 믿음으로 윤리가 실종된 삶을 살면서도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아르뱅주의자들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바로 대표적인 아르뱅주의자입니다.

그의 손에 통치되는 바벨론은 그래서 멸망할 충분한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신앙은 칼빈주의적입니까? 알미니안적입니까?

아니면 아르뱅주의자입니까?

칼빈주의자들이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구원을 얻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신앙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믿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아르뱅주의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참된 신앙의 표식은 ‘회개’에 있습니다.

그 ‘회개’는 필연적으로 고도의 신앙적 윤리를 동반합니다.

오늘날 만연되 있는 아르뱅주의를 경계하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회개’와 ‘성도의 윤리’를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수아의 고별설교 1 (전철민목사) 
증거의 단 (전철민 목사)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수집거부  |  사이트맵  |  온라인문의
Add : 구글지도에서 '샬롬 프레지던시 스쿨'을 입력하시면 찾아오실수 있습니다
Add : 2F Shalom Presidency School, Golf Course Extention Road, Sec 56 Gurugram
Tel : 조영태 목사 (98995 76389) E-mail : seesatman@naver.com/
Copyrignt www.gurgaon.or.kr Reserved. made by woo020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