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BER LOGIN

MEMBER LOGIN

 
우리가 믿는 신앙 (전철민 목사)   13-01-07
jcmm   3,991
 
막 6장 14~ 29 <우리가 믿는 신앙>

1. 세례 요한의 죽음의 의미
* 오늘 본문 말씀은 사실 중간에 끼인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떠났다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중간에 끼워 넣은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례요한의 죽음의 기록입니다. 
먼저 헤롯왕이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헤롯왕이 여러명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두 살 이하의 모든 아이들을 죽였던 왕이 있습니다. 일명 헤롯 대왕이라고 알려진 그 헤롯왕 그의 아들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헤롯왕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헤롯 안티파스라는 사람입니다.
이 헤롯왕가는 아버지 때부터 이 가문자체가 사이코 집안입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학살했고, 아들들, 며느리, 손녀 모두 추악한 집안의 모습을 보였던 집안입니다.
 아버지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아들들은 그 지방을 나누어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 등장하는 헤롯 안티파스를 왕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분봉왕이 맞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지역의 장으로서 도지사, 주지사쯤 되는 한 지역을 다스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로마는 이 헤롯 안티파스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무지 왕으로 불릴 만한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
 그가 얼마나 불경하고 부도덕한 왕이었는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로마로 가던 길에 그의 배다른 형제의 아내를 보고 반합니다. 매혹당하죠. 그 여자의 이름이 헤로디아입니다. 그리고 헤롯은 그녀에게 청혼을 합니다. 헤로디아는 청혼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지금 헤롯왕의 아내와 (나바티아 왕국 아레타스 4세의 딸) 이혼하라고 합니다. . 결국, 헤롯은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자신의 형제 빌립의 아내인 그녀와 결혼을 합니다.
 뿐만아니라,
 헤롯은 자신의 생일 잔치를 크게 벌여놓고, 흥청망청 거렸습니다. 그때 그와 결혼한 헤로디아의 딸..살로메 이제는 자신의 딸이죠. 그 아이가 춤을 출때 그 소녀에게도 반합니다. 미혹됩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결혼 직전의 처녀인데 당시의 천한 신분의 여자들이 추는 음란한 몸짓의 춤을 추었고 여기에 헤롯이 반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근친 상간에 해당되는 죄를 범하는 순간까지 오게 되죠.
 그래서 헤롯이 말합니다. 소원을 말하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고 합니다. 완전히 빠진거죠. 헤롯은 왕국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지역을 담당한 사람입니다. 또한, 로마의 허락없이 누구에게 줄 수도 없었습니다. 여자한테 빠져서 허세를 부리는 거죠.

 헤롯왕! 형제의 아내와 결혼했던 헤롯, 자신의 아내를 버린 왕, 생일 잔치에 딸에게 미혹되는 음란한 모습의 왕. 왕이라고 할 수 도 없는 망나니입니다. .

그런 이 헤롯왕의 치명적인 실수는 의로운 세례요한을 자기 허세 때문에 죽인점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왕을 비난했습니다. 옳지 않은 결혼, 잘못된 왕의 태도 하지만, 세례요한을 의롭게 여겼던 헤롯은, 눈에 가시이지만, 그에 말을 달게 듣습니다. 그래서 죽이진 못하고 감옥에 가둬 두죠. 그런데, 결국,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출때 나라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허세의 약속 때문에 헤로디아의 꾀로 인해 세례요한의 목을 자릅니다. 세례요한은 순교하게 되죠. 

 오늘 본문이 특별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2가지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전도여행중에 이 스토리를 끼워 넣었을까요?
세례요한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삶이 의로웠고, 또 그 의로움을 선포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의로움 때문에 헤롯왕과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의로움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는 세례요한 이 모습은 우리 주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모욕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진리를 외쳤을 때, 핍박과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 - 진리와 의로움으로 사셨던 그분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핍박과 외면, 죽음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세상은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걷다보면 외로움이 찾아옵니다. 때로는 핍박도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에게 근본적으로는 관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쩔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길에 서야 하고, 의로운 길에 서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외면을 당합니다. 핍박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방식은 세상의 이치를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치를 따라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외로울때, 억울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낮아지셨습니다. 이 땅에 피조물로 오시고, 피조물에 의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조금만 참지 않았어도  능력으로 휩쓸어 버릴수 있었지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도 자기 사명을 알았기 때문에 사명따라, 좁은 길로, 의로운 길로 빛을 비추다가 사라져 갑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낮아지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제자들의 전도여행속에 굳이 이 내용을 끼워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향해 갈 때 사명 따라 살아갈 때, 세례요한과 같은 삶의 상황속에서 맞서 싸우고, 권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자기 소임을 다하는 것. 끝까지 낮아지는 것. 

 오늘날 믿는자가 많아지다 보니, 교회가 힘으로 세력을 키우려고 합니다. 참 복음은 참 교회는 힘을 과시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낮아지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강해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납니다. 우리가 죽을때 우리가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가는 신앙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또 한 가지 우리는 헤롯왕의 모습을 통해 참된 왕의 모습을 예수님과 비교하게 됩니다.
 헤롯왕은 (헤롯 안티파스) 로마로부터 왕이라 인정받기를 소원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와 권력은 남의 여자를 갈취하는 통치였고, 자신의 아내를 내쫓는 통치였고, 엄청난 허세를 나타내는 통치며, 결국, 의로움을 제거하는,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 통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할 수 있는 권력이고 보여주는 통치입니다.

반면, 주님의 모습은 그것과 전혀 반대되는 통치입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에 헐벗고 굶주린 백성과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서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치유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돈을 위해서나 권력을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다스리는 통치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위하지 않고, 가난하고 상처받는 자의 편에 서시며,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통치.
 헤롯왕과 예수님의 통치는 이 세상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줍니다. 이 세계는 헤롯과 같은 인물이 왕으로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작년 연말에도 대통령 선거를 하였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우리는 고민합니다. 어떤 리더가 올바른 리더로써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인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어떤 누구도 온전하지 않고, 완벽하게 나라를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수많은 공약을 내세워도 한계는 있습니다.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 18대 대통령이 당선이 되었을 때, 어떤분은 본인이 원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아서 담배를 피기 시작한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기대와 기쁨에 도취된 분도 계십니다.
 
 담배핀다고 절망할 것도 아니고, 쾌재를 부른다고 안심할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통치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말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는 밝지 않을것입니다. 세상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통치는 다릅니다. 헐벗고, 굶주린, 상처받은 자들 속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감싸안으시고, 힘주시고, 함께 아파해주시고, 들어주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5년의 삶을 위해 리더를 뽑는 것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데, 나의 모든 삶을 다스리시는 인생의 통치자를 우리가 의지하지 않는다면, 큰 일입니다.

2.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오늘날 기독교를 오해하는 몇가지가 있는데,
 1. 어떤분은 교회가, 신앙생활이 우리들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곳이고 교회 충성할 수록 손해 보게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기독교의 교주 정도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기독교에 대한 큰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또한, 교회를 하나의 단체나 기업형식으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만나보면, 이런 물음과 인사를 합니다. 교회 잘 됩니까? 이 물음에는 마치 교인이 많이 모여야 사업이 잘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목사를 많이 평가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키면 사업을 잘하는 것이고, 성도수가 많지 않을때는 사업을 잘 못하는 것처럼 취급 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신앙인들 조차도, 아니 목사님들 조차도 교회를 하나의 사업체처럼 생각하는 경우. 이것은 믿는 사람이 얼마나 세속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이런 취급을 당하고, 믿는 분들까지도 교회를 사업처럼, 기업처럼 생각할 때 슬픕니다. 정말 슬픕니다.
 기독교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 어떻게 빛이 될 수 있을까? 과연 교회를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 내면에도 이렇게 평가하고, 기준세우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움직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14절에 14절 -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예수님은 그동안은 드러내시면서 사역을 하시지 않고, 절제하시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면서 본격적으로 본인의 사역을 나타내시기 시작하십니다. (간접적으로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예언되어진 그 메시야가 오셨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기 시작하십니다. 온 이스라엘에 퍼지게 됩니다.

 그러자,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떤 반응이 나타납니까. (15~16절)
15절 -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절 -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가 출현했다 생각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가 왔다라고 하고 헤롯왕은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1) 선지자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동안 이스라엘에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400년 동안 없었던 거죠.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기나긴 침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자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등장하시자, 기다리던 선지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 또한 엘리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엘리야라고 생각한 이유는 ,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예언 때문입니다.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6절 -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때가 되면, 엘리야와 같은 자를 보낸다는 것,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볼 때 말라기 예언을 생각했고, 엘리야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3) 그리고 헤롯 왕은 세례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었던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엘리야, 선지자, 세례요한  그들이 생각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한 특별한 인물들입니다. 시대 시대마다 쓰임받았던 하나님의 메신저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을 때 분명 특별하고, 위대하게 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추측은 모두 틀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은 대단하신 분이 아닙니다. 위대한 분이 아니십니다.
 왜그런가요? 사람이 감히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비교해서 위대한 분, 놀라운 분, 대단한 분 이게 아니라, 그분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스스로 계신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비교해서 평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례요한을 보세요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영웅이었습니다. 사람이 난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없다고 평가했고, 당시 헤롯 왕 조차도 세례요한의 말을 권위있게 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도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죄인이요, 작은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예수님을 위하여 작아졌습니다. 주님은 흥하여야하고 자기는 쇠하여야 한다고 고백하고 평생을 예수님 소개하다가 초라하게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한 낮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하나님은 비교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주의 창조자요, 우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보좌는 하늘이고,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며, 사단과 귀신들도 두려워 떠는 분. 모든 만물들이 그 영광을 노래하고, 바다의 물들과 하늘의 별들도 공손하게 명령을 듣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믿는 것이 기독교이고, 그분을 섬기는 곳이 교회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분이 다스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유와 행복을 방해한다고요, 교회 충성할 때 손해 본다구요, 교회가 사업이라구요. 목사가 교회를 성장시킨다구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만큼은 세상의 생각과 오해로 교회를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한가지 더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세상은 교회에 대해 기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교회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해야 하고 세상보다 앞서서 봉사활동과 사회사업을 통해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세상의 이 기대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대한적십자사가 1905년에 고종 황제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고종 황제가 적십자사를 창립하면서 했던 말이 있는데, “널리 구제하고 고루 사랑하라” 는 말이었습니다. 참 멋있는 말입니다.
그후 106년동안  재난 지역 구호, 구제, 헌혈, 남북 대화의 창구등 참 많은 구제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새롭게 총재로 취임하는 (유중근) 총재에게 어떤분이 우편으로 소금 한 자루를 보내왔고, 또 선물로 초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스스로 태워서 빛을 내는 촛불처럼 빛과 소금이 되어서 사랑과 봉사의 사명을 다하라는 격려의 표시였다고 합니다. 적십자사는 정말 그렇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나아가는 구제 단체입니다. 적십자 뿐만 아니라, 컴패션이나 월드비전등 귀한 구제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단체들은 영향력이 있고, 칭찬을 많이 받습니다. 저도 이런 단체를 보면 도전이 많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가 이런 모습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사역을 하는 교회가 칭찬을 듣기 마련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이것은 당연히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모습이긴 하지만, 교회는 이정도로 그치는 곳이 아닙니다. (마 5:13~14)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는데 교회가 빛이고 소금이라는 말.  단지 구제, 봉사의 개념의 중요성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을 말합니다.

적십자사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일. 그 이상의 일을 감당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 영혼을 살리는 곳입니다. 죽어가던 자가 살아나는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감당하는 곳입니다. 살기좋은 나라, 살기좋은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자들이 부활하는 곳이요, 삶의 완전한 회복이 일어나는 곳, 영원한 세계까지 영향력을 주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오신 목적이 세상에 배고픔을 해결하고 억압받는 강대국에서 해방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요구했지만, 주님은 완전한 자유, 완전한 회복, 죽은 자들의 부활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기독교의 목적, 교회의 목적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봉사와 구제사업은 커녕. 사람 수를 불리기 위해, 덩치 불리기 위해 급급하고, 각기관들이 (남전도회, 여전도회, 교육파트가) 교제 잘하기 위해, 서로 위로받기 위해, 사회 봉사를 통해 보람을 찾기위해 존재하려고 한다면, 진정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오해하는 질문중에 제 가슴에 크게 남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 헌금은 어떻게 사용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다 가져가시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을 때 얼마나 민망하고 충격이었는지 모릅니다. 사역자들 먹고 살려고 헌금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이것은 아이들의 무서운 경고의 말입니다. 교회 성장의 이유가 헌금 많이 해서 덩치를 키우기 위한 것. 일많이 하기 위해서 교제가 풍성하기 위해서 아니잖아요.
 
 주님은 너무나 슬퍼하실 것입니다. 왜 이렇게 나의 몸된 교회가 세속화 되었니? 어떻게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할 사명자들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니?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주님이 사역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추측과 잘못된 기대처럼 예수믿는 우리가 교회를 제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정도로 취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역사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생사화복이 달려있는 중대한 주제들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삶을 조금 더 편리하게 만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살고 죽는 문제이고, 천국과 지옥의 문제이고, 축복과 저주의 문제이며, 흥하느냐? 망하느냐? 문제라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세상속에서 흘러오는 신앙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이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때 빛과 어둠의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안에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를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서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송구영신예배 - 전철민 목사)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수집거부  |  사이트맵  |  온라인문의
Add : 구글지도에서 'church of immaculate conception '을 입력하시면 찾아오실수 있습니다
Add : church of immaculate conception in sec 45
Tel : 조영태 목사 9899576 389) E-mail : seesatman@naver.com/
Copyrignt www.gurgaon.or.kr Reserved. made by woo020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