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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전철민 목사)   13-05-20
jcmm   4,062
 
막 8 : 27~ 38  제목 :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1)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여러분! 인생에서 결국 유일하게 근본적인 물음은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시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해서는 안됩니다. 이 대답에 여러분의 영원한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너무나 훌륭한 답변을 합니다. 29절 -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  그는 주저함 없이 그리고 담대하게 이것을 선포합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자기 스승 예수님이 약속된 구원자이며 옛날부터 예언되어온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훌륭한 고백이죠. 또한 이 고백은 당시의 정황상으로 봐도 대단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선생님이셨고, 낮은 신분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이 멸시했던 선생님이십니다. 그런 선생님을 따라다니면서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약속된 메시아라고 신뢰했다는 것은 아주 대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승을 이렇게 신뢰하며 따라갈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멋진 신앙고백뒤에 주님께서 가혹하리 만큼 베드로를 야단치십니다.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훌륭한 고백후에  금방 야단맞는 베드로.

사실 베드로는 그 멋진 고백처럼 예수님을 신뢰하며 따라 다녔지만,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대한 온전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메시아의 의미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가시는 길은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 꾸중을 듣습니다.
 그들이 좇았던 구원자는 자신들이 속박받는 로마제국을 쳐부수고 그 속박에서 벗어나 유대 민족을 영원한 강대국으로 세우실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께 따라다녔던 주님이 왕이 아니라 죽으시러 가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좇아 다녔던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난의 길, 죽음의 길 그것은 그들에게 못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들죠. 결국, 주님은 
  그런 훌륭해 보이는 고백을 했던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결국, 야망을  좇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모습, 제자들의 모습은 현재 돌아봐야 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시간 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은 보통 분들은 아닙니다. 지금 이 예배시간에 오신 분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어떤 희생과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오셨음을 압니다.
 이 시간 예배하기 위해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나오셨습니다. 또는 다른 중대한 시간보다 이 주일을 소중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내 문제 우리 가정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시면서 오신 분도 계십니다. 그 외에도 어떤 손해와 희생, 그리고 무엇인가 한가지는 분명 포기하고 이 자리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신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훌륭한 모습이 있어도 주님을 잘못 알고 오셨다면,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시는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저는 간혹 정말 용기있는 믿음의 분들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분명히 책임지시고 인도하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철저하게 신뢰 하는 분들입니다. 교회 건축을 하는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말 큰 액수를 헌금하시는 분을 봤습니다. 그 분들에게 그 액수는 자신이 할 일을 접어두고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먼저 마음을 드리는 분들입니다.
집을 사려고 했는데, 교회 상황을 보며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분.  사업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헌신 하시는 분. 결혼자금을 털어서 헌금하시는 분등 그분들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분명 더 좋은 집으로 주실줄 믿습니다.  사업을 축복해 주실줄 믿습니다. 결혼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참 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그 분들의 사업을 번창하게 해주신 것을 봤고, 좋은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축복하신 것을 봤습니다. 또 결혼자금까지 헌신한 사람에게 인간적으로 수지맞았다고 표현할 만큼 결혼을 잘하신 분의 간증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가지 생각할 것은 만약, 주실 줄 믿습니다. 했는데, 하나님이 안주시면 어떻게 될까요?
 이 때 대답하시는 분 중에 그건 믿음없는 생각이야 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채워주신다. 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내 믿음보다 내 확신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하나님의 섭리가 더 우선입니다. 그래서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맹목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맹목적인 믿음으로 나갈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분명 채워 주실줄 믿습니다. 했는데, 조금 늦게 주시거나, 혹 안 주시면 엄청난 실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왜 이렇게 지체되지, 이렇게 세월이 지났는데 왜 안 주실까” 이 생각이 점점 심하다 보면, 그 믿음에 대한 좌절이 찾아 옵니다.
저는 그 믿음대로 받은 분도 봤지만, 안주셔서 절망하는 분도 많이 봤습니다. 절망하는 분들은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대적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이런 분들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잘못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계획이 있으실 수도 있는 분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죠. 
  베드로의 믿음과 제자들의 믿음이 그런것입니다.
“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 라고 고백하면서 핍박이 와도 선생님을 따라다녔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수제자로써 선생님을 의지했지만, 주님이 고난과 핍박을 당하시겠다고 하자.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항변한다고 합니다.
 31절~ 32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여기서 항변하다는 것은 꾸짖다 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펄펄 뜁니다.  선생님을 책망하였 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확신하고 자신이 믿었던 것을 뒤로하고 주님이 다른 일을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다 흩어지잖아요. 자기가 하던 일로 돌아갑니다. 심지어는 완전히 무기력에 빠져 버렸습니다. 왜요? 자신이 확신했고, 자신이 맞다고 한 일에 매진하다가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의욕과 상실감이 몰려 왔습니다. 누가 잘못입니까? 주님이 뒤통수 치신 건가요? 그들의 믿음, 그들의 지식이 잘못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오늘날 이런 모습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왜 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손해보고 희생하며 이 예배시간에 나오셨는데,  내 생각과 하나님이 생각이 다르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 안해주시면 어떻게 하실것입니까? 기도응답 안하시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실망하시겠습니까? 교회를 떠나시겠습니까? .

얼마전 한 집사님과 대화했는데.. 하나님앞에서 채워 주실줄 믿고 나아가셨던 과거의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참 귀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저는 안 채워 주실 수도 있다는 믿음인데요.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채워 주실줄 믿습니다. 하고 신뢰하는 것 좋습니다. 하지만, 채워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이 뜻이고, 채워주시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다 라는 것.
 다니엘의 세 친구를 기억하십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때, 풀무불이라는 용광로 형벌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왕이 사정합니다. 살려줄테니 제발 절하라고 그때 그들의 고백은 왕이시여 우리는 우리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풀무불에 들어갈지라도 우리는 절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 풀무불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절하지 않고 차라리 죽겠습니다.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하지만, 안 살려주셔도 제 신앙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더 깊고 놀라운 하나님의 생각을 뒤로하고 내 생각대로 일방적인 모습의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생활이 하나님의 생각을 모르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신앙생활 하기 때문에 신앙이 우상화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를 위한 신앙.  신앙이 나를 채워줘야 하는, 나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고, 나를 위해 예배가 필요하고, 주어가 나입니다.

* 우리의 신앙.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기도하는대로 무조건 응답받는 식의 신앙,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는 신앙,  예수 잘 믿으면 영웅이 되어 세상에서 주목받고 드러나는 식의 신앙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윤택해지고, 세상에서 명예를 얻어 믿는 자로서 영향을 미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관심없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서 잘되자, 성공하자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왕, 수퍼스타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이 되셨고, 멸시받는 종이 되셨고, 배척 받는 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핍박과 고난과 오해를 받고 살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은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삶의 모습은  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승리하십니다. 주님의 승리는 죄와 사단과 죽음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영적인 해석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육적인 해석이 아니라 영적인 해석을 하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나는 예수님을 알아!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 우리는 그분께 예배하기 위해 에배당에 모였어! 이렇게 말하지만, 그 속에 정작, 그분이 나를 창조하신 분이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고, 생명과 평안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내 목자, 내 친구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직도 예배드리면서 애매 모호한 관념만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베드로와 제자들과 다를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힘을 북돋워주고, 은혜가 충만한 말씀을 하고 싶지만, 그게 안됩니다. 여러분, 이거 해결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지금 이 자리는 내 인간적인 복을 구하는 구차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기도응답을 받기 위한 곳도 아닙니다. 설교 한 편 듣고 가는 곳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여러분이 헌신하고 결단하고 가는 곳입니다. 십자가를 만나셔야 합니다..

 예배는 날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구원자를 바라보는 자리이며, 주인앞에 종으로서 감사하고 그분만을 찬양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을 구원하셨듯이 내 삶도 하나님께서 이끄심을 믿고 맡겨드리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우상숭배가 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예배는 나를 채워주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입니다.
 
  2) 제자의 삶 (십자가로 나아가는 삶)
그리고 더 나아가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부인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너무 편하게 믿으려고 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되야 합니다. 이것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 헌신과 대가 지불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은 제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값을 치르지 않고 복음을 통해 자유로이 주어졌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이 말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이 위대한 구원을 받아 들이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자기만의 십자가입니다.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 매일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나를 부인하고 죄와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결코 면류관을 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전혀 싸우지 않고 편하게 편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많은 고난과 역경속에서 신앙을 지키려 했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있으면서 출애굽의 험난한 과정을 통과했고, 바벨론의 포로생활 속에서 믿음을 지켰고, 로마시대 지하 카타쿰 동굴에서 평생을 살면서 역경을 통과했습니다. 우리나라 선조들은 신사참배에 맞서서 싸우다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각자 삶에 수많은 어려움에서 신앙을 지키려고 살아갑니다. 이런것이 진짜입니다.
 편하게 편하게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통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이 너무 필요합니다.
  저희누님 가정이 사업에 실패로 참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번씩 통화하면, 누님이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언제쯤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을 벗어나게 해 주시려나, 주위의 많은 분들이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해 주신다고 격려합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 너무 오래 되다 보니, 참고 인내하다가 한번씩 큰 낙심에 빠지고, 다시 힘을 내서 살아가다가 또 큰 낙심에 빠집니다. 참 힘들게 생활해 나가고 있습니다.
 몇주 전에도 너무 힘들어 하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차라리, 기도를 하지 않고, 사람들의 확신있는 특별한 격려가 없으면 받아들이고 살겠는데, 기다리면 주신다는 격려와,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침체가 된답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들의 격려와 기도의 초점이 물질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 다 왔어. 뭐가 다옵니까? 다시 돈에 여유가 생기는 시간이.. 기도를 하면 어디에 초점을 두겠습니까? 매일 매일 한숨 쉬면서 눈물 흘리면서 회복시켜주세요. 회복 시켜주세요. 뭘 회복시킵니까?  돈입니다. 그 기대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답이 안보이니,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주위에 조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뜻에 대해서 너무 잘못 확신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해석도 잘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돈을 통한 여유에 대해서 해석하고, 하나님도 그런 분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화하면서 또 누님을 울렸습니다. 주위에서 이 터널을 통과하면, 밝은 태양이 비춰 진다는 물질적인 축복에 대한 말들은 다 잘못되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반드시 회복 시켜서 축복 주신다는 것은 성경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누님의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만나고 싶어한다. 물질이 나를 평안하게 한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고, 지금 하나님께서 만나고 싶어하고 함께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겪는 것들이 고난이고 고통이고 괴로움이라고 보는 자체가 잘못이다. 함께 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을 바라봐라. 
 그리고 다시 누님을 울렸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준이 자신의 안락과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주님은 우리를 부끄러워 하실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주는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귀하게 여깁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자신을 부인하는 삶,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한 삶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우리의 욕망과,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인 안락함이 목적이 되어버렸다면 저는 그것이 저주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마지막에 누나와 통화하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누나에게 권면하는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데, 참 안타깝다. 차라리 고통받고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는 누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유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기보다 고통속에서 자신을 부인하려고 하는 지금의 누나의 삶이 축복이다. 잊지말아라.
 전화를 끊기전에 누님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면서 통화를 마쳤습니다. “그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다시 해볼게”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면 모든 것을 얻고 아무것도 잃어버리는 것이 없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 
오늘 성경에 35~38절까지 자기 목숨이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이 되면서 주님의 최종 통첩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목숨과 비교해서 생각해야 할 자기부인의 삶의 모습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시냐고 물으시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이 대답에 객관식 문제처럼 4개중에 하나, 둘을 골라서 말한다든가 주관식문제처럼 단답형을 말하는 식의 대답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예수님은 좋은분, 예수님은 구원자, 예수님은 나의 목자, 예수님은 나의 친구. 물론 다 맞습니다. 아쉬운 것은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답, 우리의 신앙은 서술형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생활에 어떤 존재이신지? 주님이 여러분의 삶에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분을 통해 어떤 체험을 하셨는지? 그분의 능력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는지? 지금 그분이 나의 삶에 무엇을 간섭하고 계시는지? 얼마나 그분과 대화하는지? 이것을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단답형의 특징은 배운대로 말하는 것이고, 서술형의 대답은 체험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 물어보면, 대부분 이런 단답형입니다. 그것은 체험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여러분 생각대로 맹목적으로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경험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자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 확인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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